어둠이 깊은 밤, 세느강 랄마교에서 한 여인이 라비크를 향해 걸어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누구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아니었다. 흐트러진 걸음걸이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여인은 세느강에 자신의 몸을 던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라비크...그는 나치정권 하에서 수용소를 탈출해 나온 독일인 외과의사다. 불법 입국자인 그는 파리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해주며 파리에서의 생활을 해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처럼 난민들에 대한 보호가 없기 때문에 그의 삶이란 그 무엇 하나 보장받을 수 없는 비극적인 것이었다. 자신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파리에서 그는 여러 번의 가명을 써가면서 의사로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랄마교에서 자살하려고 하는 혼혈녀 조앙ㆍ마두를 만난다. 파리의 하늘아래 거대한 개선문을 배경 삼아 이렇게 두 사람의 기구한 만남에서 소설 <개선문>은 시작된다.
파리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찾아온 조앙ㆍ마두는 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자가 된다. 이러한 상황이 그녀에게 삶의 비참함을 가져다주어 그녀는 어두운 밤 세느강변으로 정처 없이 나온 것이다. 두렵고, 외롭고, 비참해진 그녀는 돌연 다리 위에서 라비크를 만난다. 라비크로 인해 그날 밤 자살이라는 깊은 수렁으로부터 벗어 나온 조앙ㆍ마두는 그의 소개로 나이트클럽 세헤라자드에 일자리를 얻는다. 전직 무명배우이기도 한 그녀는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며 파리에서의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차츰 라비크를 만나면서 그녀는 그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라비크 또한 그러한 그녀가 불법 입국생활로 불안정한 자신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실로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이기도 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서 자신의 생명이 끝나지 않는 한 잊히지 않을 기억이 되살아난다.
베를린, 어느 여름밤의 게슈타포의 건물, 창문 없는 텅 빈방에서 양동이의 물에 틀어박혀 질식했다가는 실신상태에서 깜짝 깨어나던 일과 철야 고문들... 반 나치주의자를 숨겨주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그는 게슈타포에게 고문을 받게 된 것이다. 자백을 하지 않는 라비크에게서 그들은 그의 최후의 행복을 빼앗아 가버린다. 라비크에게 자백을 얻기 위해 그의 여자를 고문한 것이다. 고문에 못 이겨 귀엽던 그녀가 자살해 버림과 동시에 그의 마지막 남았던 행복도 끝장나 버린다. 그를 이 지경까지 밀어 내 던졌던 거기에는 고문 기술자 하아케가 있었다. 하아케는 그에게 있어서 지상에서 오직 유일한, 그러면서 마지막 남은 복수의 대상이 된다.
라비크는 망설인다. 조앙ㆍ마두의 사랑 앞에서 자신을 이해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도 닫혀 있음을 본다. 조앙ㆍ마두처럼 사랑에 자신을 온통 내 던지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이 자신의 현실을 전혀 변화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라비크를 조앙ㆍ마두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럴수록 그녀는 그에게 몰두하지만 라비크의 닫힌 과거의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결국 그들에게 사랑의 조화는 시간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한 시간이 흐르면서 라비크는 자신도 조앙ㆍ마두처럼 이러한 현실에서는 사랑이 오히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녀의 사랑이 조금은 완벽하지 못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조앙ㆍ마두를 사랑하게 된다.
허지만 우연한 사고에 뛰어들어 응급처치를 하다가 자신의 신분이 탄로가 나버린 라비크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추방되는 불운을 만나게 된다.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그리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조앙ㆍ마두의 말을 뒤로한 채 육 개 월 동안 스위스 등지에서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는 다시 세헤라자드와 오시리스가 있는 파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자신 불법 입국자라는 사실 이외는 상황이 변해 있었다. 조앙ㆍ마두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다시 그를 만나고자 하지만 라비크는 냉담해한다. 몇 개월 전, 아니 조금 전까지 그녀를 향해 맹목적으로 타오르던 열정이 비로소 거짓이라는 것을 그녀를 통해 확인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러한 라비크를 향해 조앙ㆍ마두는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당신은 나를 사랑했지 않느냐고, 그리고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고,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둥 매달려 보지만 라비크는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린다.
이런 중에 라비크는 우연히 하아케를 만난다. 너무나 뜻밖에 그와 조우한 것이다. 하아케는 라비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까지 한다. 라비크는 계획을 세웠다.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다.
라비크는 떠올리기도 싫었던 그 시간을 되돌아본다. 게슈타포의 건물과 창문 없는 방과 반 나치주의자 막스 로젠베르그, 그는 내가 끝까지 행적을 말하지 않아서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눈앞에 잡혀와 하아케로부터 몸이 갈기갈기 찢기지 않았던가! 빌만, 그가 민주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한쪽 눈은 달아나 버리고 이빨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리젠펠트는 우리들에게 그의 혈관을 물어뜯어 달라고 했다. 취조 때문에 이빨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귀여운 시빌, 그녀는 머리가 텅 비었지만 사랑스러웠다. 시빌을 내 눈앞에 데려왔을 때 얼마나 절망했던가. 귀여운 그녀는 고문에 못 이겨 자살하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이 하아케 네가 유들유들 웃으면서 자행한 일들이다. 수용소를 탈출해 나오면서 라비크는 이러한 끔찍한 일들을 모두 잊으려고 했다. 허지만 잊힐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아케에 대한 복수도 단념하려고까지 했다. 그저 모든 일들을 그의 삶과 무관한 무엇으로 바라보려고도 했다. 허지만 하아케가 자행했던 수 백, 아니 수천 사람들에 대한 취조, 그 고문을 생각하자 그는 도저히 용서되어서는 안 될 돼지새끼라는 것이 생각되었다. 녀석에 대한 복수를 접어둔다는 것은 또 다른 수천 사람들의 고문을 방관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결국 오시리스 창녀촌에서 매춘부들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보려고 늦게까지 궁상거리는 하아케를 만났다. 라비크는 치밀하게 계획해 둔 올가미 안으로 하아케를 유도하는 데 성공한다. 탈보트에 하아케를 태워 파리의 근교 숲으로 유인했다. 차 안에서 녀석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급정거와 동시에 만능 스패너로 그의 번들거리는 머리통을 내려쳤다.
복수는 끝났다. 해가 떠오르고 두꺼운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지난날의 일들이 되살아났다. 항상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던 시빌이 비로소 자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시절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그녀는 정말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거처로 돌아온 라비크는 허무감을 안고서 누워 있었다. 그때 조앙ㆍ마두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앙ㆍ마두와 관계를 가졌던 남자배우의 권총 사건으로 그녀가 위급해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총알은 그녀의 목을 스치고 일곱 번째 척추에 가서 박혔다. 순정적인 정열로 그를 사랑하면서도 항상 엄습해 오는 불안을 견뎌낼 수가 없어서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로 관능의 방황을 계속한 그녀는 라비크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고 만다. 라비크, 내 곁에 있어 주세요. 당신은 나를 떠나시면 안 돼요. 부탁이에요. 그리고 그녀가 라비크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 말이었다. 라비크, 살려 주세요, 지금 곧.
선전포고가 선포되었다. 유럽에서 피난민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프랑스도 전쟁이 일어난 지금에는 더 이상 피난처가 못된다. 더 도망쳐보아야 이제는 소용이 없다.
호텔에는 불법 입국자들을 수용소에 집결시키기 위해서 경찰이 와 있었다.
성은. 프레젠부르크. 이름은. 루드비히. 직업은. 의사.
경찰은 그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들어 보이면서 묻는다. 혹시 라비크라는 의사를 아시오. 모릅니다. 트럭에 태워진 그는 에트와르 광장의 짙은 어둠을 바라본다. 거기서는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에리히·M·레마르크는 나치의 정권 하에서 망명생활을 한 작가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비극적이었다. 전운이 감도는 유럽하늘아래서 그는 아름답고 애절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모든 것은 불분명하고, 미래는 암울한 그래서 적당한 피난처조차 없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어떤 걸까.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할 수 있는 그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는 소설 <개선문>에서 이러한 구절을 쓰고 있다. 라비크가 앙테르나쇼날 호텔에서 처음으로 문학에 대해 갖는 견해다. 우연은 현실에서나 일어나는 것이다. 문학에는 우연이라는 게 없다. 아니 결코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문학은 단단한 것이다.
레마르크는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단지 우연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같이 피난처를 찾아 떠도는 난민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무엇도 없다. 개선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도, 오시리스의 창녀들도, 루브르 박물관도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유형의 것들일 뿐이다. 그들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바퀴벌레처럼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들과 무관하며 단지 그들은 벌레들이 살듯이 살아만 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미쳐버릴 것이다. 유럽을 뒤덮고 있는 혼란을, 그것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갈기갈기 찢어져 버릴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자. 그래야 만이 난민들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망명문학은 성공을 일구어 냈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가져다준 비극적인 환경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난민들의 영혼을 씻어준 것이다. 그리고 에리히·M·레마르크 자신 또한 그 자신의 비극을 우연이 들어설 수 없는 문학으로 완성시켰다. 그는 아마도 깊은 어둠이 뒤덮인 세느강의 랄마교 위에서 조앙ㆍ마두를 만나면서 문학에 관한 자신감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개선문> 말미에서 수용소로 향하는 라비크가 에트와르 광장의 어둠 때문에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는 트럭 위에서 던진 말처럼.
그렇군요. 하고 라비크는 말했다. 인간이란 여러 가지 일을 참아낼 수 있으니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