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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maker 8시간전

Sailing

결혼을 하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어쩌다가 <Sailing>을 듣게 되었다. 발라드풍의 로드 스튜어트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이내 상념에 젖었다.  

    

이제는 기억조차도 먹먹한 순천...

중앙로의...<세모시>.

2층의 그 카페에서 반짝거리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듣게 되었던 그 노래.  

   

로드 스튜어트의 <Sailing>은 그렇게 해서 나의 가슴 안에 간직되었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녀와 함께.    

 

그러면서 언젠가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그때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던 기억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글은 그것에 대한 나의 약속인 셈이다.     


그 시절이 내게 소리 없이 내려왔다.      

(1997년 이른 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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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ling>


금방이라도 초겨울 날의 첫눈이 내릴 듯한 날씨였다. 경남 M읍으로 떠나는 순천 발, 일요일 새벽 열차는 우리 일행을 들뜨게 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순천 지역 H대학교 산악회에 참석했다. 그동안 혼자서 혹은 서넛 이서 인근의 여러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던 나는 그 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11윌 말이 되자 다시금 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럴 즈음 순천 지역 H대학교 산악회의 산행 소식을 들었다. 산을 오르는데 적당한 인원이 함께 하는데다가 산악 회장이 날더러 이번에는 (사실 H대학교 소속으로 순천에 상주 근무해오면서 적어도 매월이면 한 번씩 산악회와 함께 산에 오르자는 제의를 받아왔다. 그때마다 무슨 이유에선가 나는 참석을 하지 못했다) 꼭 산을 같이 오르자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던 터라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산행 목적지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순천과 구례를 중심으로 그 주변 산들을 주로 오르내렸던 나에게 그 산은 전혀 낯선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향수는 낯선 여행지로 떠나는 호기심이다. 버스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내릴 때, 그때 밀려오는 마음 가득한 우수 어린 자유.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풍요로운 저 자유. 여수(旅愁)의 나그네가 되어 홀로 있을 때의 고독. 그것은 산을 다닐 때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   

   

경남 알프스. 산악인들에게는 그렇게 불려졌다. 이른바 가지산 도립공원을 포함한 주변 산세까지를 그렇게 부르는 모양인데 어쩐 일인지 경남 지방의 산을 오른다는 것이 나는 처음이었다. 그곳은 내게 설렘으로 와 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산행 준비를 서둘렀다.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우리 일행이 목적지로 하는 그곳은 시간과의 다툼이기도 했다.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몇 번의 경유지를 거처 목적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는, 적어도 우리가 월요일에 각자의 근무처에 지장이 없도록 복귀해야하는 한정된 시간 내에서 계획되어져야 했기에 시간은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순천에서 S읍은 열차 편으로, 경유지인 S읍에서 M읍은 다른 열차 편으로, M읍으로부터 가지산 입구까지는 버스 편으로, 그렇게 도착지까지의 시간만도 어림잡아 다섯 시간 넘어 소요될 예정이었다.     

 

S읍으로 떠나는 열차는 새벽 한시에 있었다. 순천을 출발하여 경남의 항구도시인 부산까지 가는 순천발 부산행 새벽열차. 우리는 도중에 내리게 된다. 초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새벽의 순천 역사는 쌀쌀했다. 플랫홈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역사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 열차는 하얀 수증기와 함께 거친 호흡을 내뿜었다. 열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는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얗게 쏟아져서 추워진 날씨를 더욱 실감케 했다. 역사의 어둠 안에서 칸칸이 불빛을 밝히고 서있는 열차의 모습은 새벽으로 떠나는 여정에 대한 설렘을 자아냈다. 열차 칸의 한쪽을 차지하고 앉은 우리 일행은 준비해 온 술로 새벽에 떠나는 여행에 대해 축배를 올렸다. 열차 창문은 밖의 어둠으로 거울처럼 보였다. 일행들의 웃는 모습과 술잔이 그대로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되었다. 새벽 열차에 올라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거울이 된 열차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와바타ㆍ야스나리의 <설국>이 떠올랐다. 소설 첫 장면에 주인공이 야간열차를 타고 가면서 통로 건너 옆자리에 앉은 한 쌍의 연인을 발견한다. 병들어 보이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몸을 부축하여 무릎 위로 떠받고 있는 여자였다. 이들에게서 어떤 사연을 상상해 보다가 주인공은 무심코 차창 밖을 보게 된다. 차창은 열차 안의 따뜻한 공기로 인해 안개처럼 물기가 서려 있었다. 차창에 서린 물기를 손으로 닦아내자 그곳에는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차창 밖 세상의 불빛들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어둠에 갇힌 물방울 같은 불빛들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둠 저 편의 비현실적인 기분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물기를 지우자 밖의 어둠을 배경으로 거울이 되어 있는 차창 유리에는 현실의 저편처럼 반사되어지는 옆 좌석 모습이 비쳐진다. 그곳에 차창 밖의 불빛들이 하나가 되면서 그것이 다시금 아름답게 흘러간다고 생각할 즈음, 그 안에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나면서 주인공은 순간 당황한다. 여자의 눈동자에서 차창 밖의 불빛이 흐르는가 싶어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 순간 정신이 돌아오자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열차는 가까운 G읍에서 정차했다. 여기에서 우리 일행은 다른 일행과 합류하기로 돼 있었다. 새벽의 어둠을 뒤집어 쓴 플랫홈의 가로등 아래에는 몇몇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제 막 도착한 열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종이 서 있는 그들은 추위 때문에 목도리로 머리 위에서 턱밑까지 묶거나 목을 움츠려 옷깃에 파묻은 모습들이었다. 모두 새벽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과 함께 등산복 차림을 한 육 칠 명의 무리가 열차에 올랐다. 그 속에서 낯익은 얼굴 몇이 우리 일행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한동안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나누고 웃음꽃이 일어났다. 우리가 탄 열차 안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때 합류한 일행들 사이에서 무심히 한 여자의 얼굴이 느껴져 왔다. 나는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하얀 얼굴이라고 느껴졌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사람들의 웃음소리 안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은 짧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등산복 차림이 그녀의 얼굴과 겹치면서 내 앞을 지나 우리 일행 속에 섞였다. 내 가슴에 부딪히는 낯선 얼굴 윤곽이 한순간 지나갔다. 문득 도시의 불빛이 느껴지며 그것은 세련된 얼굴이라 생각했다. 낯선 도시에 가 내리면 가슴이 저리듯이 가슴에 와 닿는 낯선 얼굴은 가로등 불빛이 되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거기 그렇게 지나가 버린 풍경. 그리고 사람. 그것은 홀로 된 영혼에 다가와 오래도록 맥놀이를 남기고는 한다. 모두 합류한 우리들은 다시금 축배를 들었다. 새벽을 가르며 목적지를 향하는 우리의 장도를 자축하기 위해서. 때마침 내 앞으로 건네 온 술잔을 받아 나는 단숨에 마셨다. 물기가 흘러내리는 차창에는 일행들의 모습이 거울 속 그림처럼 비쳐졌다. 일행들은 술잔을 건네기도 하고 준비해 온 과자를 먹기도 했다. 열차는 짙은 새벽어둠을 가르고 달려 나갔다. 밖에는 눈발이 긋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이 트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에 우리는 S읍을 경유해서 우리의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M읍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술로 인해 생긴 얼굴의 열기를 밀어냈다. M읍 역사는 두꺼운 새벽안개에 쌓여 있었다. 역사의 불빛은 달무리 지듯 동그랗게 갇혀 있어서 그 정경이 우리들로 하여금 잠간동안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걸어 나와 있는 기분을 만들어 주었다.  M읍에도 초겨울의 추위가 와있었다. 몸을 움츠린 체 어둠 속의 추위를 맞으며 우리는 목적지인 가지산 입구로 가기 위해 버스가 대개하고 있는 터미널을 향하여 움직였다. 차갑고 두꺼운 새벽안개를 밀어내며 아직은 어둠이 짙은 역사를 무장한 군인들이 야간 행군을 하듯이 빠져나갔다. 무릇 여행지를 나서는 일행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듯이 낯선 지역, 더군다나 추위와 어둠 속의 이동에서는 더 흔히 그렇듯이 일행 중 몇 사람이 잠시 방향을 잃고 넋두리를 빼앗기는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도 이 일은 예외가 아니었다. 두 명의 아가씨가 M읍 역사 화장실에 간 사실을 잊은 채 모두 망연히 들 떠났다. 가지산을 가기 위한 터미널에 도착해서야 낙오자가 확인되었다. 낙오자는 G읍에서 합류한 일행이었다. 모두들 어떻게 된 상황인가 하며 수런거리고 있는 가운데서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가 있었다. 열차 안에서 보았던 하얀 얼굴의 그녀였다. 두 아가씨는 함께 온 가까운 동생들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는데 그는 아마도 앞서 출발했을 거라고 했고, 결국 그녀도 우리 모두와 함께 터미널로 와 버린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M읍 역사로 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우리일행 중 한 사람과 급히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갔다. 어둠 속에서 사라져 버린 그네들을 역사에서 만났다. 멀리 동쪽 하늘이 보라 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그네들과 함께 일행이 기다리는 터미널에 도착했다. 하얀 얼굴의 그녀가 보이고, 그녀는 우리를 만나자 몹시 반가워했다.     


가지산은 차가운 아침 공기와 함께 두꺼운 정적에 쌓여있었다. 삼삼오오 짝을 이룬 일행은 한기 속에서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를 들으며 산길로 들어섰다. 가지산 국립공원 입구에는 커다란 사찰이 하나 있었다. P사라 불리는 그 절까지 가는 길에는 양옆으로 아름드리나무들이 아침의 정적 속에서 도열해 있었다. 옷가지를 벗어버린 나무들은 흰 서리를 뒤집어 쓴 채 스스로가 묵언의 세상에 안주하고 있어서 그 모습이 흡사 수행 중인 구도자 같았다. 하얀 얼굴의 그녀가 두툼한 파카를 걸치고 털모자를 눌러 쓴 채 가벼운 걸음으로 저만치 가고 있었다. 동생들이라는 두 아가씨와 함께 무슨 이야긴가 끝에 웃으면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예쁘게 보였다. 간간이 바람에 흔들리는 P사 경내의 풍경 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왔다.


준비해 온 짐 하나를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나는 일행을 따라 가지산 나무들이 겨울을 맞고 있는 산으로 들어섰다. 영남 알프스. 이 가지산 계곡 중 하나는 얼음골이라 불렸다. 무더운 여름에도 지형적인 관계로 인해 그곳 계곡 일부지역에 얼음이 언다고 하여 얼음골이라고 했단다. 우리 일행이 도착해야 할 목적지는 그곳 얼음골이다. 그곳까지는 입구의 P사로부터 대략 여섯 시간 거리. 산을 오르면서 일행 각자는 그 시간 동안 서로를 격려하며 산행을 마쳐야 한다. 산의 정상을 오르지 않고 바로 우회하여 목적지까지 가는 산길을 우리일행 중 많은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그곳으로 가면 제 시간에 산행을 마무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 오면 항상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산을 찾는다는 일부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산행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이 정상을 오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적어도 우리들 중 몇몇은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 산을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산정으로 이어진 가느다란 등산로는 언제 만나도 가슴이 설렌다. 그들에게 이것은 본능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규정하는지 모른다. 거기 산이 있어 산정(山頂)에 오른다고. 산 속 모든 등산로에는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수많은 사연이 되어 선연하게 박혀 있으리라 믿으며.     

 

일행이 긴 행렬을 이루며 제일 먼저 휴식을 취한 곳은 가지산 중턱에 위치한 조그만 학교였다. 작은 교문위에 적힌 명칭은 <고사리 분교>. 이렇게 높고 깊은 산 속에서도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일행들 모두는 신기해하는 듯 했다. 고지대이지만 이 깊은 산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삶을 통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교육방식을 끈끈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선택한 생활 속에서 그네들의 2세가 이 분교에서 배우고 자랄 수 있도록...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 혹시, 그들은 시인 이 태백처럼 봉정사에서의 고절한 맛을 가슴 시리도록 맛보면서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을 잊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산에서는 무엇보다도 물이 귀하다. 고사리 분교 마을은 이 산을 넘어 얼음골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급수 공급지였다. 물을 각자의 수통에 가득히 채운 우리 일행은 산등성이 너머를 향했다. 굽이지는 산등성이를 따라 그중 높은 봉우리 하나. 천왕봉. 머리를 들어 숨을 고르자 파란 하늘 아래 저 멀리 산 정상이 보였다. 등산객들이 오고 내리는 그곳 가지산 정상까지는 한눈으로도 가파른 경사다. 한 발치, 내 앞에서는 하얀 얼굴의 그녀가 그곳 구릉지의 경사를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식량 배낭을 짊어진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라 잠간동안 심호흡을 하고 서 있는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등산로 옆 능선에는 고산지대에 자라는 갈대가 군락을 이루어 황갈색으로 물결쳤다. 아가씨. 힘이 들어 보이네요. 물 좀 드릴까요? 그녀를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괜찮다고 그랬다. 먼저 가세요. 그녀는 등산로 한쪽으로 비켜섰다. 안경 쓴 그녀의 얼굴이 웃었다.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내 가슴 한쪽 어딘가에서 구릉지의 황갈색 갈대들이 몸 부비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실례하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물결치는 황갈색 갈대를 배경으로 그녀의 웃는 얼굴이 대답했다. 저, 이 주연인데요. 이름이 제 조카 이름과 똑 같네요. 말해 놓고 나는 갑자기 겸연쩍게 웃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가 세련된 모습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평지가 나왔다. 산 정상을 눈 발치에 두고 나온 평지는 산행에 나온 사람들을 끌어안는다. 이른 새벽부터 이어진 산행은 우리들을 힘겹게 했다. 모두에게 휴식이 필요했다. 생각보다 드넓은 그곳 평지에는 등산로 옆 야생 갈대가 끊임없이 이어져 와서 또 하나의 군락을 이루어 퍼져 있었다. 일행들은 하나 둘 씩 야생 갈대를 침대 삼아 눕기 시작했다. 코끝에는 갈대가 뿜어내는 냄새가 갈대 줄기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묻어 나왔다. 그곳은 정상을 거쳐 얼음 골로 가는 방향과 정상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산줄기를 넘어 목적지인 얼음 골로 내려가는 이를테면 등산로가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여기서 나누어지기로 했다. 얼음 골로 내려가는 계곡 입구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서 정상을 오르는 사람들과 얼음 골로 곧장 내려가는 사람들로. 그녀는 정상을 오를 수 없어 보였다. 휴식처인 그곳 평지에는 칠 팔 명의 일행과 함께 그녀가 남겨졌다. 나는 그녀와 그곳에 남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나의 호감 때문이었다. 나는 자신의 호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쩐지 누군가가 내 마음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됐다. 배낭 몇 개가 그들과 함께 남겨졌다. 나의 무거운 배낭도 함께. 배낭에는 그들을 위한 음식이 풍족하리라. 그들은 배낭을 열어 야생 갈대밭 귀여운 새앙 쥐 마냥 조심스럽게 그 음식들을 먹을 것이다.  

   

정상은 걷고 걸어서 어렵게 정복되었다. 그곳에는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이 장난스레 쌓아 올린 두 개의 커다란 돌무더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쌓아 올려진 돌탑은 파란 하늘색과 조화를 이루며 마치 커다란 돌장승처럼 서 있었다. 정상 주위에는 산을 올라온 사람들로 붐볐다. 산정을 오른 우리들은 장승 형상을 한 돌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건너편 산등성이에서 한 무리의 새 떼가 저 멀리 산자락을 따라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 한가롭게 느껴졌다. 숨을 고르며 산 정상을 내려오자 완만한 등산로가 한동안 이어졌다. 얼음 골 계곡 입구까지 등산로는 이처럼 완만할 듯 했다. 하나의 얼굴이 하늘 끝에서 걸어왔다. 그녀가 생각났다. 갑자기 부신 햇살이 미간을 흔들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치 무슨 생각하나를 떨쳐버리듯이.   

   

산 정상을 정복한 우리 일행은 얼음 골 입구에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과 만났다얼음 골로 내려가는 계곡은 급경사였다. 자칫 부상을 입을 수 있는 힘든 길로 보였다. 우리일행은 각각 몇몇이 짝을 이루었다.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일에 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다시금 하얀 얼굴의 그녀를 만난 나는 그녀와 두 아가씨가 있는 그룹으로 갔다. 나는 그녀와 함께 그 계곡을 내려가고 싶었다. 깊고 수려한 계곡은 끝없는 바위와 돌무더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양쪽 옆 절벽이 오랜 세월 동안 절편으로 한 조각씩 떨어져 나와 그 조각들이 무수히 쌓여있는, 바로 거기에 사람들은 등산로를 만들어 계곡의 절경을 즐겼던 것이다. 내려가는 길에서는 절대 주의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 딛는 발에 힘을 주고요. 그리고요. 저는 좀 엉뚱한 데가 있으니까 저에게만은 주의를 주지 마세요. 정말이지 주의를 주어서는 안돼요. 왜냐하면, 가다 보면 알게 될 겁니다. 나는 경사지의 돌들을 밟아 내려가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방귀를 뀌었다. 제법 커다란 소리가 나왔다. 계곡의 돌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던 아가씨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배를 잡고 주저앉아 웃기 시작했다. 다른 둘도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 방귀 소리는 조용한 계곡에서 더 크게 들렸다.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나를 즐겁게 했다. 그녀와 그들의 웃음소리는 잠간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얼음골은 초겨울 바람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일어났다가는 사라졌다. 아닌 게 아니라 얼음이 언다는 지역의 바위들 틈 속에는 두꺼운 얼음덩어리가 큼직큼직 얼어붙어 있었다. 회자에 전해져온 소문으로 유명해진,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지역에 우리 일행들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나는 그녀와 아가씨 둘이 서 있는 곳에서 얼음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녀의 뒤에 서서 포즈를 잡은 나는 그녀로부터 머리 결 체취를 맡았다. 해가 지는 얼음 골 계곡 어딘가에서 바위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얼음골을 출발해 M시를 경유하여 순천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이다. 버스 안에서 나는 그녀에게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녹음기에 이어폰을 연결한 그녀의 고개가 리듬을 따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건네준 테이프는 한참 유행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제1집 노래 모음이었다. M시에 도착하자 그곳 터미널에서 그녀는 나에게 따뜻한 군밤을 한 봉지 사주었다. 저, 이것 드세요. 나는 그때 비로소 그녀의 음성을 또렷하게 들었다. 맑고 예쁜, 서두르지 않는 여린 목소리구나. 순천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 모두는 산행으로 무거워진 몸을 눕혀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ㆍㆍㆍ습관처럼 일상이 앞에 있었다. 방금 산에서 돌아온 우리 일행은 모두 헤어지고 최후로 나는 혼자가 되어 익숙한 이 도시의 뒷길을 걸어왔다. 문득 고독해져 오는 이 기분. 혼자가 되었다는 기분이 가져오는 정적. 산에서 돌아온 일행 모두는 안개가 되고, 혹은 저렇게 안개 속에 묻혀 있는 고개 숙인 가로수처럼 그리움으로 남겨졌다. 혼자가 된 지금에. <가지산을 다녀와서> ․ ․ ․ 1992. 11. 29. 일기에서.    

   

자선 바자회일일호프 행사가 마련되었다. H대학교 순천 지역 산악회를 포함한 동아리들의 모임에서 마련한 행사였다. 나는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그녀를 알고 있는 학우에게 연락을 했다. 그 학우는 그녀의 언니 친구였다. ○○씨, 이번 행사에 이 주연 씨와 같이 참석해 주었으면 하는데. 꼭. 나의 말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인가 보군요.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어 그냥 그렇다고 했다. 호프집에는 초저녁 이른 시각부터 학생들이 붐볐다. 나는 호프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예정된 시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 학우와 함께. 검정색 투피스차림의 그녀의 모습이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헤집고 들어왔다. 그녀를 보자 반가웠다. 그녀는 그 학우와 함께 몇몇 사람들이 있는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학생들이 음악 반주를 따라 노래하는 시간이 왔다. 조금씩 들뜬 실내는 음악과 술 냄새와 담배 연기로 열기를 뿜었다. 어쩐 일인지 그녀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가수 <이선희>가 부른, 곡명은 <갈등>. 호프를 마시면서 나는 그녀가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를 거라고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다. 노래 끝에 박수 소리가 터졌다. 나도 내 마음을 담아 박수를 힘껏 쳤다. 누군가가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행사가 끝날 무렵, 나는 그곳을 떠나 길 맞은편에 있는 호텔 옆의 커피숍 <블랙ㆍ펄>에서 그녀와 둘이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노래가 좋았다고 말해 줬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녀는 생머리 결을 하얀 목 밑까지 단정하게 빗어 내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깨끗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이 좋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허락된 짧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모두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 도중에 간간이 예. 예 라는 대답만 했다. 나의 어떤 말에 대한 대답인지 혹은 공감인지는 나도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술 때문에 조금은 취했다고 느꼈다.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나이트클럽 <위너스>가 자리한 호텔 지하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그 학우와 함께 테이블 두 개를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와 나는 그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경쾌한 음악이 실내를 흔들며 떠다니고 있었다. 음악의 열기가 나이트클럽에 모인 사람들을 휘몰아 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리듬을 타고 있었다. 무대는 온통 번들거리며 돌아가는 조명등과 몸을 흔드는 사람들의 율동이 뿜어대는 싱그러운 열기로 어지러웠다. 우리들도 무대로 나갔다. 다시금 현란한 조명이 돌아가면서 사람들의 율동을 더욱 멋지게 만들었다. 리듬을 따라 바뀌는 동작 속에서 우리들은 경쾌한 쾌감을 느끼고 거기서 뜨거운 열기를 만졌다. 그녀는 뜻밖에 춤을 잘 추었다. 리듬을 따라 빠르게 혹은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그녀는 조금 전의 그녀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의 흔들리는 몸매가 불현듯 현란한 조명 속에서 나의 눈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이 순간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음악이리라. 빠른 음악 뒤에 갑자기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일순간 정적이 오면서 뒤이어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 나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나의 요구에 동의했다. 그녀와 나는 음악에 맞추어 즐겁게 블루스를 췄다.   

  

나이트클럽을 빠져나온 우리들은 순천 역사 앞 해장국 집으로 몰려갔다. 깊어져 가는 밤을 잊어버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술을 몇 잔씩 더 마셨다. 나는 그녀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역사 쪽에는 열차의 기적 소리가 어둠을 타고 들려왔다. 역 광장으로 밤하늘의 별은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한동안 뜨거운 해장국과 술로 속을 달래던 우리들 중에서 누군가가 이제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흐트러진 몸을 가누며 하나 둘 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길 건너 역 광장에서는 여전히 별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어둠과 별빛으로 뒤덮여진 각자의 길로 떠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도 몇몇 일행과 함께 택시를 불러 떠났다. 그녀와 오늘의 작별인사를 생각했던 나는 작별인사를 못 나누고 헤어지게 되자 적잖게 당황했다. 순천과 가까이에 인접한 D시에는 그녀의 집이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통해 들었던 터라 그녀의 집 위치를 어림잡아 알고 있었다. 승합차를 가지고 나온 키가 작고 신뢰가 가는 후배에게 부탁했다. 그와 나는 D시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녀를 만나 여전히 남아 있는 오늘의 작별 인사와 거기에 베여 있는 나의 호감을 재차 전해 주고 싶어서였다. 그녀를 꼭 만나야 한다. 그녀를 꼭 만나야만 한다. 어둠에 뒤덮인 고속도로를 줄기차게 달려와 D시에 먼저 도착한 나는 그녀의 집 앞 근처에서 기다렸다. 그녀의 집은 문구를 판매하는 가게였다. 그 앞에서 나는 잠간동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크고 작은 별들이 어두운 밤하늘에서 반짝거리다가 이내 쏟아져 내리는 듯 했다. 총총한 별빛 아래로 D시의 적막감이 느껴졌다. 잠시 후 가게 앞 큰길가에 택시가 다가와서 섰다. 이제 막 택시에서 내리는 그녀가 보였다. 가게 앞 셔터를 올리고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녀를 나는 뒤에서 붙잡았다. 셔터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 채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잠시 동안 소란해졌고 그러다가 안으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웬 술을 마시고 행패야. 젊은 사람이 말이지. 술을 마셨으면 좋게 마셔야지. 어디와 행패냔 말이야. 파출소에 연락해. 경찰 불러. 경찰. 그녀의 아버지는 으름장을 놓았다. 내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가 나에게로 왔다. 이보시오. 젊은 사람.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술이 한 잔 된 것 같으니 내일 와서 이야기하시면 어떻겠소. 나는 그녀의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뜻 여인의 목에서 목걸이 하나가 반짝거리며 불빛을 밝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불교도가 목에 거는 일종의 장신구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자 어쩐지 나는 편안해졌다. 그러면서 걷잡을 수 없는 나의 행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그 여인의 말을 받아 들였다. 아무튼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몇 번인가 내 쪽에서 만나기를 희망했는데 그녀는 거절했다. 전화도 거절하겠다고 경고했다. 저하고는 상관없는 그쪽의 일일뿐이에요. 나는 그녀의 완강한 거절에 당혹스럽고 한 편으로는 자책감이 따라왔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내 쪽에서는 그녀를 만나야만 했다. 정말로 어렵게 그녀의 마음을 돌렸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자는 나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녀가 생활하는 D시의 <아틀란티스>라는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상황은 나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고, 그것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나의 그간의 행동으로 인한 갑작스런 혼란이 그녀를 당혹하게 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내가 그녀에게 취한 행동은 어찌됐든 나의 진실임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나의 진실이라는 일련의 행위는 누가 보더라도 어느 정도 엉뚱한 그것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이해시키지 못했고 더욱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진실 된 면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어야 할 순박한, 말 그대로 순박한 책임이 있었다. 설혹 그것이 상대방에게 아무 의미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불행하게도 그녀를 그 혼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어야 할 책임도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의 모든 행동은 내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흐르자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내가 그녀에게 보인 행동만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감추기는 싫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약속 시간에 맞추어 나왔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서툴렀지만 나의 뜻을 받아 달라고. 그녀는 짧게 말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러면서 내가 듣기에는 대단히 장난스러울 정도로 허지만 정확하게, 그쪽의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오 년 정도 지난 후에 생각해 보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말한 오 년은 내게 있어서 너무도 길고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필요로 하는 시간적인 의미와 함께 정확한 의사표시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그 말이 그저 그녀의 거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순히 그녀가 거절한다는 것이라고 판단이 내려지자,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서 스스로 정리한 마음을 그녀에게 말해야 할 때가 왔다고 단정을 내렸다. 그동안 주연 씨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진실이었습니다. 이 후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약속드립니다. 저를 믿고 주연 씨의 일상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순천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아픈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나로 인해서 생활의 혼란을 받았을 그녀의 마음 때문에 그랬다. 그리고 순전히 나의 의지일 테지만, 내게로부터 그녀에게로 생겼던 길을 다시는 걸어가서는 안 된다는 스스로의 약속 때문에 아픔은 가중되었다. 어떻게 순천까지 돌아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겨울은 바람이 되어 세차게 휘몰아 쳤다. 바람이 되어 걸어오는 겨울이 춥게만 느껴졌다. 


일 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꽤나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또 몇몇 기억되는 것을 얻기도 했다. 삶이란 적어도 그런 것이라는 것을 내게 가르쳐준 기간이었다. 나무에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그와 같이 늘 새로운 시간은 어느덧 늦가을을 보내고 초겨울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가을이 비켜간 자리에는 투명한 초겨울의 하늘이 정밀한 모습으로 내려왔다. 옷가지를 훌훌 벗어버린 나무들이 초연한 사내와 같다고 느껴졌다. 가까운 G시에 시험감독 출장을 갔다. 하루 동안의 감독을 끝마치고 행정실의 유리창 밖을 통해 학생들이 붐빈 좁은 주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며 나는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곧은 초겨울 햇살이 창밖의 사람들을 정물화처럼 만들었다.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조금 흔들었다. 정물화 속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있었다. 무심히, 그저 무심히 서있는 내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는 놀랐다. 그녀가 거기 있었다. 틀림없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무심히 서있던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를 보다니. 아니, 이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니. 그녀를 불러야 한다. 나는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녀가 그녀의 일행들과 같이 있었다. 반가웠다. 나는 다가가서 반가운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그리고 뭐라고 해야 하나. 나의 간단한 인사말이 뒤이어 엮어지질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잘 지내셨어요...자꾸만 나의 언어가 비껴 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무어라고 하나....반갑네요. 그러자 그녀도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그녀가 하얀 얼굴로 웃으면서...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하얀 얼굴이었다. 그녀의 모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잠시 후 그녀의 하얀 얼굴은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집으로 전화를 드려도 되겠습니까...그녀는 그저 웃음을 담은 얼굴로 있었다. 다시...전화해도 될까요. 그녀는 밝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예. 그렇게 하세요.     


ㆍㆍㆍ삶은 눈물겹도록 그리움인 것을...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알 수 있다ㆍㆍㆍ< 아, 다시 그녀를 만나다 > 1993. 12. 13...일기에서.     


나는 그녀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다. 순천의 <국도극장> 건너편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책을 한 권 들고 앉아 기다렸다. 하얀 목 밑 선까지 예쁘게 빗어 내린 생머리 결이 그녀를 아름답게 했다.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그녀의 화장이 너무 예뻤다. 그것은 그녀를 세련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갑자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마주보고 웃었다. 나는 향기처럼 퍼져오는 행복감에 젖어 좀처럼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웃고 있는 그녀가 내가 그토록 만나 데이트하고 싶었던 그녀라고 의식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방금 영화가 종영되었는지 건너편 극장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몇몇 사람들은 영화의 감동을 못내 아쉬워해서 여전히 비현실적인 얼굴을 하고 나왔다.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다시금 극장 앞은 한가해졌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커피숍을 나왔다. 그녀와 나란히 같이 걷자 나는 또 다시 행복해졌다. 사람들이 붐빈 시내 중심가를 걸었다. 사람들 사이를 한가하게 걷는 그녀와 나는 다정한 연인이었다. 걷다가 그녀의 옆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황금극장>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제목은 <피아노>였다. 그녀와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을 느끼자 나는 다시 한 번 행복해졌다. 그녀는 나의 어깨에 기대어 왔다. 그녀의 머리 결 체취가 은은하게 전해져왔다. 영화 화면이 잠시 동안 정지해 오면서 저 멀리 어디에선가 바위조각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관을 나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커피숍 <세모시>로 들어갔다. 넓은 유리를 통해 밖의 경치가 내다 보였다. 불빛이 반짝이는 거리를 젊은 연인들이 걷고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그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며, 세상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하고, 예쁘고, 논리 있게 말을 했다. 조용한 실내 분위기와 어울려 그녀의 모습이 나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음악이 바뀌고 실내에는 로드ㆍ스튜어트의 <Sailing>이 흘러나왔다. 음악의 부드러움에 젖은 우리는 잠간동안 말을 잊었다. 로드ㆍ스튜어트의 감미로운 고음이 커피숍의 넓은 유리 너머 밖의 불빛에게로 흘러갔다. 불빛은 하나 둘 씩 작은 배가 되어 밤하늘의 별들 사이로 떠나갔다. 우리는 각자를 원하고 있었다. 각자의 생활 속에서. 나는 그녀를 원했고 그녀도 나를 원하고 있었다. 순천의 밤이 깊어 갔다.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은 밤의 저편 어디로 떠나갔다. <세모시>에서 마지막까지 남았던 우리 둘은 거리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 오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투명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우리의 머리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D시를 가는 택시를 불러 그녀를 태웠다. 그녀를 보내고 난 후 나는 익숙한 도시의 거리를 걸어갔다. 호주머니 안에 손을 넣은 채. 주머니 속에 든 그녀가 내게 가져다 준 행운을 만지작거리면서.    <끝>.   1997

지금의 그녀, 그리고 딸과 아들 2024년 여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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