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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Mar 22. 2024

사물과 사건, 제목의 두 대칭

제4장 제목, 언어술사의 마법 상자

사물과 사건, 제목의 두 대칭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목은 시의 문이다. 나는 제목을 확인하지 않고 시를 읽다가, 엄청난 내공이 느껴지면 바로 제목부터 다시 살펴본다. ‘어, 이게 무슨 작품이지?’라는 질문을 하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제목’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인의 문장이 ‘나’에게 열리면서 작품의 모든 형상 또한 새로운 방향으로 문을 연다. 이때 제목은 이계(異界)의 채널을 수렴하는 주파수가 된다. 언어술사들이 사용하는 초록빛 마법의 상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작품을 소개할 때도, 반드시 제목을 함께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때는 이름으로써의 역할이 수행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제목은 작품의 여기-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문’에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현존을 알려주는 ‘주소지’가 붙어 있다. 모든 우편물은 이 주소지를 향해 가고, 문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이런 단편도 가능하다: ‘그 언덕 모퉁이에는 오래된 건축물이 있지. 외벽은 붉은 벽돌로 둘러싸여 있지만, 무성한 담쟁이넝쿨로 가려져 겨우 단단한 질감만 확인할 뿐이었어. 몇 가지 장식품이 놓인 정원은 파릇파릇하고 가지런히 깎인 잔디와 함께 이 공간이 잘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지. 사각의 블록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성당 분위기를 풍기는 아치형 철문이 나와. 칠한 지 오래된 페인트는, 그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군데군데 벗겨져 있으며, 빗물이 흘러내린 부분은 어김없이 녹이 슬어 있지. 하지만 건축물 전체를 압축한 것처럼 단호한 아우라를 가졌어. 그때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어. 신음하듯 문에서 거칠고 불편한 마찰음이 났지. 난 그에게 소포를 건네면서 철문의 오른쪽 상단을 다시 확인했는데, 거기에 고딕체의 주소가 붙어 있기 때문이었지. 우편물과 주소지를 확인한 후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다시 일에 집중했어. 초로에 가까운 그는 밖을 살피더니 철문을 닫으며 담쟁이넝쿨 속으로 들어갔지. 그 건축물은 잠시 인기척이 끊겼고 고목처럼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지.’      


                                                            *     


위의 단편에서 배우들은 정확히 자신의 역할을 분담되고 있다. 초로의 ‘그’는 작가고 ‘우편배달부’인 나는 독자다. 또한 ‘건축물’은 작품이며, ‘소포’는 이해와 해석, ‘문’은 제목이다. 내가 제대로 인식한 것처럼 철문은 작품의 일부이지만, 작품과는 전적으로 독립된 것으로써 작품과 관계한다. 이처럼 제목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자못 크다면, 과연 어떻게 써야 할까? 그 유형과 방식은 있을까? 


자, 그럼 언어술사의 마법 상자를 열어보자. 대체로 시의 제목은 두 영역으로 대칭된다. 하나는 구상이고 다른 하나는 추상이다. 여기서 구상은 사물과 사건으로 분별되고, 또한 개념을 매개로 추상으로 건너간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전이되는 방식도 이와 동일하다. 주목할 것은 이들 각각이 모두 제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구상은 사물과 사건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돌’이나 ‘비단 이끼’, ‘검은 구름’, ‘커피’, ‘아스팔트’, ‘일곱 늙은이’(보들레르) 등이고 후자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 ‘한국전쟁’, ‘4・19혁명’, ‘5・19광주민중항쟁’ 등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적 사건이나 ‘다락에서 낮잠을 잔 일’, ‘아버지 몰래 밤새도록 거리를 쏘다닌 일’, ‘진달래꽃을 꺾어 화첩을 만든 일’ 등 개인적이고 사소한 사건이다. 대부분의 제목은 이 두 영역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추상의 영역에 다가선 제목도 많다. 이를테면, ‘만물조응’이나 ‘상승’(보들레르), ‘장소를 위한 시’(랭보), ‘끝과 시작’과 ‘자아비판에 대한 찬사’(쉼보르스카) 혹은 ‘비대칭’이나 ‘방향을 빌려와서’(베이다오) 등과 1930년대 시인 이상의 ‘오감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를 도식화해보자.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제목의 유형은 크게 ‘사물’과 ‘사건’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는 다시 ‘구상의 영역’과 ‘추상의 영역’으로 대별할 수 있다. 여기서 구상이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形)을 갖춘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을 말한다. 이 ‘구상의 영역’에는 인간을 비롯해 동물과 식물 등의 생물과 그 외의 무생물이 포함된다. ‘벌레 먹은 사과’나 ‘낮달’ 등이 있다.  


아울러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과 서로의 중력권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구상’에 속한다. 개기일식은 지구와 달의 작용이고, 녹아내린 빙하는 인간의 욕심이 초래한 결과다. 사건은 역사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두 가지로 분류된다. 창작자가 살고 있는 시대 혹은 역사에 대한 시적이고 정치적 발화를 통해 창작자의 입장을 개진하거나 ‘쓰나미’나 ‘지진’ 등 자연재해에 대한 문학적 발언 등이 속한다. 또한 버려진 길고양이를 데려와 키운다거나 매미의 맹렬한 울음소리를 듣고 느꼈던 감정 등 개인의 사소하고도 평범한 일상의 일들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풀어내면서 자신의 삶을 공동체로 확대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사물과 사건은 일차적으로는 구상의 영역에 속하지만, 추상의 영역에 더 가까운 것들도 많다. 여기 식탁 위에 벌레 먹은 사과가 있다고 치자. 그것은 분명한 실체로서, 사과의 개념과 형상을 가졌다. 껍질째 먹기도 하며 즙을 짜 주스로 마시기도 한다. 어떤 것은 단단하고 어떤 것은 다소 물렁물렁하다. 붉은색부터 푸른색, 노란색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식탁 위의 그것이 ‘사과’라는 점은 변함없다. 그 사과를 자르니 안쪽에서 벌레가 꿈틀거렸다. 여기까지가 ‘구상의 영역’이다. 


그런데 그 사과를 보는 사람은 갑자기 어제도 이런 일을 겪은 듯한 기시감에 빠진다. 사과는 언제부터 식탁에 놓여 있던 것일까? 자문하지만 생각은 명쾌하게 답을 내리지 않는다. 아마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애완견 리트리버가 옆에 앉아 사과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먹고 싶은 모양이다. 벌레 먹은 사과와 그 사과를 바라보는 ‘나’와 ‘리트리버’, 그리고 어제와의 경계를 지워버린, 오늘과 내일이 갑자기 회전한다. ‘나’는 이런 사태에 대해 ‘벌레 먹은 사과의 회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것은 추상의 영역이다. 이와 관련된 시는 다음과 같다.      



사과를 씹는다 개가 앉아 당신을 쳐다본다 사과를 씹으면서 개의 목덜미를 만지는 얼굴은 어제의 당신과 똑같다 어제의 나도 사과를 씹으며, 당신을 쳐다보는 개의 목덜미에 손을 얹는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낮과 밤의 밝은 주황이 점멸한다 악기들은 꿈을 꾸며 격렬하게 소리를 낸다 스튜디오는 북촌 방향으로 휘어지고 시간은 같은 자리를 반복한다 사과를 움켜쥔 손가락은 사과가 회전하는 방식 짓무른 날씨는 오후의 햇볕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이름을 모르면서도 서로를 안다고 믿는다 당신은 벤치에 앉아 간단한 사과를 씹는다 개가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어제부터 당신의 웃음은 사과의 이빨자국처럼 뚜렷하게 입에 걸려 있다 여름이 지날 때까지 그렇게 걸려 있다 신체의 일부를 강탈당한 채 사과는 어제의 개를 쳐다본다 

─ 박성현, 「사과의 회전」 전문     



과연, 당신은 이 ‘사과’에 어떤 이름을 붙일까. 나는 이 시의 제목에 ‘회전’을 더해 ‘추상의 영역’으로 다가서게 했다. 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추상의 영역으로 갈수록 제목 또한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은 작품의 외연을 확대하는데 결정적일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요컨대,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독자의 상상과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높다는 것이다. 여행 혹은 파라다이스를 모티프로 삼은 영화가 <천국보다 낯선>27)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면, 또한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의 제목이 <정오의 낯선 물체>28)라면? 아마도 영화의 몰입감은 반감되기는커녕 도대체 작품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유추하기 위해 더 집중할 것이다. 상당히 유연한 효과다. 


물론 이 예는 작품이 성공한 경우다. 창작자들은 추상의 영역이 오히려 작품을 더 난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적으로 맞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의 경험으로, 이런 성공을 유도하려면 제목 자체에 정확한 개념(혹은 형이상학)이 내재해야 한다(창작자 또한 내가 무엇을 쓰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 미국이라는 천국의 허상을 명민하게 강조하고 있으며, 후자는 인간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비(非)-인간적 존재들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시도 마찬가지. 작품으로부터 직접 이끌어내거나 일단 작품에서는 비켜 있지만 확실하게 작품으로 향하는 단어나 문장은 다른 식으로 의미를 판단할 여지를 준다. 이 경우는 독자의 감정보다는 이성과 사유에 호소하므로, 자칫 무의식적으로 쓸 수 있는 현학성을 최대한 줄이는 게 관건이다. 


참고로 무작위로 선별된 제목의 유형을 살펴보도록 하자.29)





(27) 짐 자무시 감독의 1984년 작(作).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여행을 통해 파라다이스를 찾는 로드무비. 그들이 다다른 세계는 천국이 아니라 한없이 낯설기만 한 황무지였다. 미국 자본주의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28) 위라 세타쿤 감독의 2000년 작(作).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감독이 태국을 직접 여행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들이 영화라는 개념으로 묶인다. 상당히 신비스러운 요소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29) 이 표에서 제목은 목차에서 무작위로 선별했다. 배치는 가나다순이며, 창작자는 성명 첫 글자를 (  )에 명시한다. 개나리(존)은 이해존 시인의 ‘개나리’라는 작품을 가리킨다. 여기서 ‘강’은 강신애, ‘김’은 김남주, ‘다’는 다나카와 슌타로, ‘박’은 박노해, ‘백’은 백무산, ‘베’는 베이다오, ‘보’는 보들레르, ‘쉼’은 쉼보르스카, ‘신’은 신동엽, ‘이’는 이성복, ‘존’은 이해존, ‘필’은 필립 라킨, ‘한’은 한인준, ‘홍’은 홍일표, ‘황’은 황지우 시인이며 참고로 한 시집은 다음과 같다: 『끝과 시작』(쉼보르스카, 최성은 번역, 문학과지성사, 2007),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홍일표, 문학동네, 2018), 『노동의 새벽』(박노해, 풀빛, 1984),『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안도현, 창작과비평사, 2020), 『래여애반다라』(이성복, 문학과지성사, 2013)), 『만국의 노동자』(백무산, 청사, 1988), 『신동엽시전집』(신동엽, 창작과비평사, 2013), 『아름다운 그런데』(한인준, 창작과비평사, 2017),『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황지우, 문학과지성사, 1998),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강신애, 문학동네, 2020), 『이물감』(이해존, 시인수첩, 2023), 『이십억 광년의 고독』(다나카 슌타로, 김응교 번역, 문학과지성사, 2009), 『진혼가』(김남주, 청사, 1984),『파리의 우울』(보들레르, 윤영애 번역, 민음사, 2008), 『필립 라킨 시전집』(필립 라킨, 김정환 번역, 문학동네, 2013),『한밤의 기수』(베이다오, 배도임 번역, 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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