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제목, 언어술사의 마법 상자
‘시’로 들어가는 문
하울의 움직이는 성(城)에 함께 사는 ‘소피’는, 문 옆의 원형 기계장치를 돌려서 다른 세계로 간다.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마법이 작동하며 성은 ‘여기-에-있음’이라는 장소의 강요된 한계를 무기력하게 만든다─여기에 있는 나는, 동시에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성은 장소를 추상하여 공간으로 재배치하며, 공간은 마법의 주인(呪印)으로 인해 다시 ‘장소’로 바뀐다. ‘여기이면서 여기가 아닌’ 비(非)-장소성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인간의 욕망이자 육체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꿈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마법이라는 허황된 연금술에 의존해야 하므로 그것은 항상 욕망과 꿈으로 남는다.
한편 사람들은 시의 제목을 작품의 머리(혹은 얼굴)로, ‘이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본문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다는 형태 때문일 것이다. 얼굴과 이름이라는 별칭은 제목으로서는 충분히 수용할 만하다. 통상 제목은 작품과 필연적 관계를 형성하며 상호작용을 하지만, 어떤 때는 작품에서 독립하여 시인의 난해한 문장을 풀 열쇠가 되기도 한다. 전자는 작품을 상징적으로 압축하거나, 작품의 의미를 보강하며, 후자는 글자 그대로 해독하기 어려운 문장을 직관적으로 풀어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가끔 제목은 작품에서 일탈하기도 하는데, 독자로 하여 시인의 의도를 벗어나 뜻밖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제목을 일종의 ‘문’으로, 시인과 작품을 연결하고, 작품과 세계를 연결하며, 마지막으로 작품과 독자를 연결하는 가시적 터널의 의미를 덧붙이겠다. 두 공간을 이어주는 일종의 웜홀이다. 하울이 주술을 건 낡은 문처럼, 제목도 ‘시’를 읽을 때마다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물론 이러한 사태는 시를 받아들이는 독자의 심리나 환경의 영향이 크겠지만, 제목의 파급력도 무시하지 못한다. 여름에 읽는 기형도와 11월에 읽는 기형도는 무척 다르다. 냄새와 색깔도 다르고, 문장에 새겨진 사물의 형상들도 다르다. 폭염 속의 얇은 ‘안개’는 온도차가 심한 초겨울의 안개와는 비교할 수 없으며26) 이로 인해 작품 속의 이미지들도 달라지게 된다.
때문에 제목은 ‘언어술사의 마법 상자’라 불러도 된다. 요컨대, 그것은 작품의 머리에 위치해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작품을 완벽히 대칭하고 또한 작품의 이면을 은밀하게 들춘다. 언어술사는 젊잖은 척, 제목을 통해 작품을 드러내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킬 때가 있다. 그의 손은 충분히 숙성되었지만, 아직 형상을 갖추지 못한 반죽 덩어리를 좀 더 상상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하울의 문을 처음 연 ‘소피’가 다른 세계를 봤을 때의 당혹스러운 눈이 떠오르지 않는가. (*)
(26) 기형도, 『기형도전집』(문학과지성사, 1999) 중에서 「안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