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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Mar 29. 2024

제목의 [문장 형식]

제4장 제목, 언어술사의 마법 상자

제목의 [문장 형식]



당연하지만 제목을 쓸 때 그 성공 여부는 제목이 얼마나 작품을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앞의 경우처럼 직접적으로 작품의 대상을 제목으로 뽑아서 시인의 의도와 작품의 방향과의 거리를 최소화한다. 하지만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기미가 있다면, 과감하게 멈추거나 다른 제목으로 바꾸는 게 좋다. 


구상-제목 중 두 번째 영역은 사건이나 사건에 관련된 사항들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다. 르포르타주라면 혹시 모를까. 이 시가 아케이드나 백화점을 주요 소재로 하여 자본주의 물신성을 고발한다고 해서 제목을 ‘백화점의 물신성’으로 지을 수 없다. ‘코코 샤넬의 일회용 저녁 식탁’이나 아예 중의적으로 만들어서 ‘보이지 않는’으로 하는 게 차라리 좋을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해 안토니오 타부키는 “철학은 오직 진리에 관계된 것 같아 보이지만 환상만을 말하는 듯하고, 문학은 오직 환상에 관계된 것 같아 보이지만 진리를 말하는 듯하다.”30)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말은, 문학이란 환상으로 출발해 진리에 도달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진리’라는 단순무결하고 직선적이고 직관적인 사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문학이 요청하는 일정한 양식을 수렴해야 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예컨대, 황지우 시인은 「몬데비오 1980년 겨울」, 「호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묵념 5분 27초」 등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참상을 (직접 말하는 방식이 아닌) 문학이 우리에게 역설하는 환상을 통해 직관적으로 드러낸다.31) 거듭 강조하거니와, 문학은 다름 아닌 ‘언어 예술’이다. 


때문에 제목을 지을 때는 두 가지 사항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절대로 현학적이면 안 되고 다른 하나는 적재적소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제목에 현학이 기입되는 순간 작품은 크게 훼손될 수 있다. 한자어나 외래어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안 쓰는 게 좋다. 평이하게, 거의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지어야 한다. 


보통 시의 제목에는 [단어]나 [단어+단어], [문장]의 세 형식이 쓰인다. 거의 모든 시의 제목이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아예 제목이 없이 본문만 발표되는 경우인데, 이때도 편의상 첫 문장의 두세 마디를 제목으로 삼는다.  


    

(1) [단어]     


여기서 단어는 모든 품사를 막론한다. 명사와 부사, 형용사는 물론이고 동사와 접속사, 심지어는 조사나 문장 부호까지 포함한다. 보통 작품 내에서 적합한 단어를 골라내거나 작품을 압축하고 상징할 수 있는 작품 외의 단어나 문장을 도입한다.      



산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들기가 인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들었다 멧비들기켠을본다

― 백석, 「산 비」 전문32)

     


이 시는 산을 적시는 비의 풍경을 묘사한다. 한폭의 경이로운 산수화가 연상될 정도로 시각적 이미지가 강조되어 있다. 특히 무절제한 감정의 범람은 없고, 산뽕잎과 빗방울, 멧비둘기와 자벌레가 자신의 좌표를 지키며 정확한 이미지를 내뿜고만 있을 뿐이다. 이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가 구현해 내는 즉물적 풍경에 과연 ‘山비’ 외의 다른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아마도 ‘멧비둘기’라고 붙이는 순간, 다른 단어들은 그 존재감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어느 산 밑

허물어진 폐지 더미에 비 내린다

폐지에 적힌 수많은 글씨들

폭우에 젖어 사라진다

그러나 오직 단 하나

사랑이라는 글씨만은 모두

비에 젖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 정호승, 「폐지(廢紙)」 전문33)

   


어느 산 밑, 낡고 허름한 창고에 쌓인 폐지. 그 위로 세차게 내리는 폭우. 시인은 비에 젖은 수많은 글씨들을 보고 있다. 비에 불어 쉽게 찢어지는 글씨들, 판도라 상자를 박차고 나올 듯한 구멍 난 글씨들의 아우성. 그러나 그 곁에서 조용히, 자신을 단속하고 가다듬는 단어가 있다. 비에 젖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단 하나의 글씨. 그것은 ‘사랑’이다. 버려졌어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절대적인 글씨─사랑. 만일 폐지와의 대비가 없었다면, 그 단어의 빛은 쉽게 무너졌을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 걱정」 전문34)

    

 

이 시를 읽으면서 눈물 흘린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은 ‘엄마 걱정’이다.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는 ‘걱정’이라는 단어가 시인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제목 자체가 너무나 사소하고 단순해서 오히려 그 의미는 최대치로 확장되어 버렸다.     

 


주먹을 쥘 때마다 심장이 터졌다 늦은 밥은 식어서 따뜻했다 구부리고 펼치다가 잘게 부쉈다      

방향도 없이, 드물게 움직였다

─ 박성현, 「하루」 전문     



이 시의 제목은 하루다. 어느 젊은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귀가했을 때 밀려왔던 우울과 허무를 표현했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지만, 무기력은 해소되지 않는다. 찬물에 말아 늦은 저녁을 먹는다. 음식을 씹는다. 구부리고 펼치고 잘게 부순다. 그는 간단한 소일을 하고 방향도 없이 잠을 잔다. 드물게 움직이기도 했다. 하루는 마무리된다. 그렇게 하루는 매일 똑같은 형식으로 다시 시작된다.     



하염없이 걷다가 

문득 하염이란 말이 궁금해졌다

가로등 아래 내려쌓이는 불빛도 하염없는데

그 말은 어디서 왔을까

─ 박성현, 「하염없이」 부분   

  

태어난 후 

내가 움켜쥔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아무 일 없던 일생이 

아무 일 없는 채로 저 길 너머로 

─ 박성현, 「사라진」 부분     


어로 이뤄진 제목은 그 품사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대상의 실체를 명확히 보여주는 단독 명사를 주로 쓰지만, 부사나 형용사도 많이 쓴다. 심지어는 ‘의’와 같은 조사나 ‘그러나’ 등의 접속사도 제목으로 쓴다. 이에 비하면 인용시의 ‘하염없이’나 ‘사라진’은 파격에 있어서는 양호한 편이다.    

  


(2) [단어+단어]    

 

이 제목의 형식은 대체로 ‘겨울의 황혼’이나 ‘시간의 눈’과 같이 관형어와 명사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결합을 바꿔서 다채롭게 만들기도 한다. ‘방향을 바꾸면’, ‘No.4 심야극장’, ‘나쁜 쪽으로’, ‘바다 끝 바다 저편, 롤러코스터’, ‘빛나는 초록은 벌레 먹은 이파리처럼’, ‘커튼, 콜’(이상 박성현)처럼 조합의 변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다가 ‘종언: 아름다운 그런데’(한인준)처럼 아예 결합 자체를 기묘하게 만들는 경우도 있다. 먼저 [관형어+명사]의 조합은 다음과 같다. 

     


음침한 금속음, 겨울의 황혼, 

하얀 벌판─광활한 원형

노를 저으며, 한 마리의 까마귀가 땅 끝으로부터 천천히 날아오른다

대각선으로 지평선을 가로지르며     


눈 쌓인 앙상한 나무들은 수정과도 같다

소멸의 부름이 나를 삼킨다

침묵한 채, 까마귀가 돌아오는 동안

대각선으로 지평선을 가로지르며

─ 제오르제 바코비아, 「겨울의 황혼」전문35)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살을 베는 칼바람이 부는 숲에서, 태양이 산발한 채 가라앉는 ‘겨울의 황혼’을 말이다. 황혼은 핏빛으로 물들면서 더욱 어두워지고 ‘음침한 금속음’과 같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대지를 덮은 거대한 손을 거둔다. 한 마리 까마귀가 천천히 날아오르지만, 눈이 쌓인 광활한 백색은 하나의 ‘광활한 원형’처럼 펼쳐진 벌판의 예외일 뿐이다. 새는 대각선으로 날고 그 선을 따라 지평선은 두 쪽으로 갈라진다. 


첫 번째 연이 생명의 시작이라면 두 번째 연은 죽음으로의 회귀를 담고 있다. 수정과도 같은 앙상한 나무들은 황혼 속에서 더욱 빛나지만 곧 소멸해버릴 존재들이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까마귀는 돌아온다. 제코비아는 이러한 엄중한 풍경을 예의 ‘겨울의 황혼’으로 명명한다. 생명과 죽음의 이중주가 연주되는 곳은 ‘황혼’(그것도 겨울의 황혼이다) 말고는 없으리라. 이외의 다른 단어는 가당치 않을 정도다. 이 제목은 작품을 장악하고 거기에 일정한 호흡을 부여한다.      



이건 시간의 눈

일곱 빛깔 눈썹 아래서

곁눈질을 한다

그 눈꺼풀은 불로 씻기고

그 눈물은 김이다.     

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

뜨거운 속눈썹에서 녹으니

세상이 따뜻해지리

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파울 첼란, 「시간의 눈」 전문36)   


  

‘시간의 눈’이 인상 깊다. 다분히 의도적이면서도, 작품을 완벽하게 감싸안고 있으며, 외풍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덧문도 열어놓은 듯하다. 상징이란 파울 첼란의 이 언어에서 꽃을 피우는지, ‘일곱 빛깔 눈썹’, ‘눈먼 별’, ‘꽃’의 잇닿음도 직관적이다. 시인은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한다. 봉오리를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은 오로지 죽음을 건넌 자에게 찾아오는 신의 축복이라고. 


때문에 ‘일곱 빛깔 눈썹’이란 삶을 넘어서는 죽음의 다채로운 현상들이고, ‘눈먼 별’이란 죽음의 속성을 아직 깨닫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이 ‘어리석음’이 ‘뜨거운 속눈썹’에 닿아 녹으면 우리의 불안은 조금 더 낮아지고, 세상은 그만큼 따뜻해진다. 시인은 이를 주시하고 확신하는 것인데, 그 모습이 마치 세계를 잉태하는 ‘시간’의 눈처럼 명징하다.      


한편, 위 결합을 뒤틀어버린 시를 읽어보자.      



퇴계로에 와서도 그 山이 보인다. 3・1로까지 걸어가는데, 봄바람 맞으며 가는데, 산은 흔들리는 자기 그림자를 발목까지 담그고 자꾸 뭔가를 게워낸다. 흙덩어리인 자기를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를 무등태운 山 그림자가 시내까지 따라온다. 죽겠다! 좀 봐 줘. 그래도 운다. 뻐꾹새 울음의 半音 플랫에 실려, 山이 가까이, 멀리, 그만 따라와! 해도 市 외곽 시립 공원 묘지 千여 구름을 싣고 淸溪川까지 흘러온다.     


                            慶州崔氏愛淑之墓

                            陰曆 一九五四年 九月 十四日 生

                            陰曆 一九八O年 九月 十八日 卒

                       여보 다신은 천사였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수철이 아빠

─ 황지우, 「에서・묘지・안개꽃・5월・시외 버스・하얀」 부분37)     



시의 내용으로 미뤄, 키워드만 뽑힌 제목을 유추해 보자. 제목으로 쓰인 단어는 ‘시외 버스를 타고 가다가, 5월 하얀 안개꽃 즐비한 묘지를 보다’ 정도가 아닐까. 아니면 ‘시외 버스가 멈춰 선 묘지에서 하얀 안개꽃을 든 5월’일 수도 있겠다. 황지우 시인은 제목의 문장 성분을 뒤죽박죽 얽혀놓음으로써 암호처럼 만들었는데, 군사독재가 정점으로 치닫던 80년대의 엄혹한 현실에서 ‘검열’이라는 압제를 은밀하게 표상한다. 


화자는 1980년 5월 31일(양력)에 사망한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시외버스를 탄다. 평소 그녀가 좋아했던 안개꽃 한 다발을 품에 안고. 그런데 퇴계로에서도 까마득히 먼 산이 보인다. 봄바람을 맞으며 가는데, 그 산은 뭔가를 자꾸 게워내고 있다. 그녀를 무등 태운 산 그림자도 시내까지 따라온다. 시립 공원 묘지에 안장된 아내 앞에 마주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화자는 말한다. 그녀가 하늘로 간 해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절정기이고 ‘무등’이라는 단어로, 얼마든지 이 같은 결론이 가능하게끔 한다. 시 자체가 ‘검열’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시냇물과 발목을 한다. 자연스러운 것은  

   

빼놓은 채로     


물방울은 돌멩이로 저지르는 것이다. 정말이 보일 때까지     


넌지시와 그윽과

바라보지 않는다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정말이 보일 때까지만

─ 한인준, 「종언: 것」 부분38)     



한인준 시인은 ‘종언’이라는 키워드에 ‘것’을 이어놓는다. ‘것’을 끝내겠다는 의미인데, 도무지 감은 잡히지 않는다. 다만, “시냇물과 발목을 한다”, “물방울은 돌멩이로 저지르는 것이다”, “정말이 보일때까지” 등의 문장으로 미뤄, 시인이 말하는 ‘것’이란 온전하고도 안전한 문장이고, 그 문장이 설계하고 건축한 세계가 아닐까.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란 기근과 지진과 전염병과 기후변화는 물론이고 내란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지옥이니, 삶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허망한 일이다. 시인은 ‘넌지시’ ‘그윽하게’ 바라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3) [문장]  

   

이 경우는 작품의 문장을 발췌하거나 스냅사진처럼 인상적인 문장을 새로 쓰는 방식이 있다. 우선 작품의 문장을 제목으로 삼았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로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정확하고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고 또한 그 좌표를 분명하게 강조할 수 있다. 작품의 핵심을 제목으로 끌어올려서 먼저 노출시키면 본문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문장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다음으로, 미학적 충격을 유발할 가능성을 한층 더 높인다.      



뜰악과 苔瓦마루에 긴 풀이 자랐다.

한 모퉁이에 자근 발자욱이 나 있었다.     

풀밭이 내다 보였다. 풀밭이 가끔 눕히어지는 쪽이 많았다.

옮아 간다는 눈치였다.     

아직 

해가 머물러 있다. 

─ 김종삼, 「해가 머물러 있다」 전문39)     



김종삼 시인은 위 작품의 마지막 행인 “해가 머물러 있다”를 제목으로 끌어올린다. 작품의 전반부는 인기척이 사라진 어느 집안의 적막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뜰악’과 ‘마루’에 긴 풀이 자라나 폐허의 이미지를 가중시킨다. 그런데, 그 한 모퉁이에도 언제 다녀갔는지 ‘자근 발자욱’이 있는 것이다. 정황상 짐승이 아니라 사람의 발자국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는 와중에 시인은 풀밭 쪽을 내다본다. 풀밭은 곧게 자라지 않고, 눕혀 있다. 옮아간다는 눈치까지 읽는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상황이 반전된다.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폐허가 아닌, “아직 / 해가 머물러 있다”는 희망이다. 제목도 마지막 행을 쓰고 있는 만큼, 시인의 의도는 점점 더 견고해지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그대를 만나러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고

그대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아직 선로가 없어도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 정호승,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부분40)     



정호승 시인도 첫 문장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았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는 문장이 연속으로 반복되는 셈인데, 묘하게도 동해의 거친 파도와 같은 ‘은율’이 느껴진다. 마음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지만, 팽목항으로 가는 길은 서럽고 안타까우며 몸서리쳐질 정도로 잔인하다. ‘나’는 꽃이 지고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이 없듯, 길이 없고 선로가 없어도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어떤 사람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전부가 아닌,

전체 중에 다수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부를 뜻함.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과

시인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마 천 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할 듯

─ 쉼보르스카, 「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부분41)     



쉼보르스카는 친구에게 말을 거는 듯, “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고 운을 뗀다. 그리고 자신의 얘기를 부연하면서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 전부가 아닌, / 전체 중에 다수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부를 뜻”한다고 잇는다. 당연한 얘기를, 마치 처음 봤다는 듯 의뭉스럽게 풀어놓는다. 더 나아가 시인은 시 전문가나 시인을 제외하면, “아마 천 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도 주장한다. 인용한 문장들은 시의 앞부분이기 때문에 시가 전개될수록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질 것이지만 시인의 말은 실로 우리의 일상과 다름없다. 그만큼 친숙하고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먼 불빛 같은 얼굴로

흘러든 당신의 허기 앞에서

나는 공손한 한 마리의 뱀

사막을 걸어온 듯

당신 발가락 사이에서 모래가

별처럼 쏟아졌다

나는 별 사이를 쏘다니다

당신의 반짝이는 허기 속으로 

귀가한다     

살 속이 따뜻하다

─ 이승희, 「나는 당신의 허기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전문42)    


 

시인은 당신 앞에서 “공손한 한 마리의 뱀”이 되어버린다. “먼 불빛 같은 얼굴로 / 흘러든 당신의 허기”를 기다리는, “사막을 걸어온 듯” 발가락 사이로 쏟아지는 모래와 그 별빛 같은 반짝임과 눈물마저 지극히 사랑하는 ‘뱀’. 때문에 시인이 걷는 길은 항상 당신에게로 향한 귀가다. 살 속이 따뜻하다는 에로틱한 감정도 이 ‘귀가’에서는 한없이 애틋하다.      



어느 날 오후 

     

초콜릿 상자를 들고 가던 춘자는 시장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안락의자에 깊숙이 웅크린 노파, 잘 익은 생선처럼 웃으며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는데 고양이는 얼굴이 반쯤 잘렸고 은회색의 느린 표정을 지었다

─ 박성현, 「초콜릿 상자를 들고 가는 춘자의 너무 느린 나선형」 부분     



이 시는 어린 춘자가 노파가 된 자기 자신과 마주치는, 다소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이다. 키워드는 나선형인데, 어느 날 오후, 어린 춘자는 초콜릿 상자를 들고 신나서 뛰어가고 있다. 도넛 가게를 지나고 문구점을 지나고, 양장점과 과일가게, 빵집을 지난다. 시장 끝 모퉁이를 돌면 집이 보인다. 춘자는 모퉁이를 도는데, 갑자기 멈춰 선다. 어느 노파가, 안락의자에 깊숙이 웅크려서는,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이다. 고양이는 그늘에 얼굴이 잘려 있고, 느린 은회색 표정을 짓는다.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어린 춘자는 불안해진다. 착각이거나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춘자는 갑자기 분화하며 각각으로 쪼개진 시간을 한데 모으기 시작한다. 


문장 제목을 통해 파격을 주는 경우도 많다. 황지우 시인은 “다음 진술들 가운데 버트란트 러셀卿의 ‘확정적 기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이나 “남동생 찾습니다 한원택 43세 1・4후퇴시 함북 청진에서 월남 대구에서 해여짐 머리에 흉토 있음 누나 한순옥”, “이준태(1946년 서울生,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 근황”이라는 제목을 썼다.43) 이승희 시인은 “아무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빛을 뿜어내는 텔레비전 한 대가 있는 헌책방”, “제목을 입력하세요”, “마음이 비워진 집이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습니다”, “늙은 토마토는 고요하기도 하지” 등의 제목을 사용한다. 이런 파격적 양상은 점점 더 강해지는데, 본문보다 제목이 더 긴 시도 발표되는 추세다. 여기서 제목은 ‘이름’보다는 그 자체가 내용이 되는 ‘의미 생산’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된다.      


                                                             *     


이 외에도 문장의 기술적인 면을 적극 활용한다. 예컨대, 본문 자체를 제목으로 쓰고 제목을 본문으로 역전하는 것이다. 시각적으로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많으면 대여섯 문장이 제목으로 쓰이니까. 이러한 전도는 명백히 미학적 노림수가 있어야 한다. 왜 이런 형태로 작품이 만들어졌는지를 충분히,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부제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통상 제목 밑에 붙는데, ‘사물 1’, ‘사물 2’…의 형태로 작품들을 한 개념으로 집중시키거나, ‘목탄으로 그린 달’ 등의 문장으로 제목을 부연한다.

 

작품들을 제목 자체를 아예 붙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훗날 연구자들은 편의상 첫 문장의 두세 마디를 제목으로 가칭하기도 한다. 어쨌든 작품의 주소지는 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통상 작품의 경향이나 시인의 의도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데 비해 오히려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정반대의 단어나 문장을 배치하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작품의 강렬한 반전을 도모하며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무척 드물다. 

     

                                                             *     


마지막으로 제목을 언제 써야 할지 궁금해하는 창작자도 있을 것이다. 현문우답이겠지만, 마음 내킬 때다. 기발한 제목이 생각나 시를 쓰기 시작할 수도 있고(이 경우 제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발표 직전까지 퇴고를 거치면서 제목까지 바꿀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넉넉하게 시간을 쓸 수 있는 것이 제목 짓기다. 용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 전체를 완성한다는 화룡점정, 제목은 분명 작품의 마지막 퍼즐 맞추기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목에만 집중한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





(32) 백석, 「산비」, 『사슴』, 열린책들, 2022, 38쪽.

(33)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하다』, 창작과비평사, 2017, 12쪽. 

(34) 기형도, 『기형도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134쪽. 

(35) 제오르제 바코비아, 김정환 옮김, 『납』, 문학과지성사, 2007, 40쪽

(36) 파울 첼란, 전영애 옮김, 『죽음의 푸가』, 민음사, 2011, 86쪽. 

(37)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40쪽.

(38) 한인준, 『아름다운 그런데』, 창작과비평사, 2017, 66쪽

(39) 김종삼, 앞의 책, 39쪽.

(40)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창작과비평사, 2017, 112쪽. 

(4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최성은 옮김,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323쪽. 

(42) 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44쪽.

(43) 언급한 제목 모두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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