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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Apr 12. 2024

새로운 여정의 시작

제5장 마지막 문장, 감동과 여운의 비수

새로운 여정의 시작



마지막 문장에 다다른다는 것은 작품이 발산하는 그 황홀하고 끈질긴 매력을 마무리한다는 말이 아니다. 불가사의하겠지만 시의 여정은 어떤 경우라도 끝나지 않는다. 읽기를 멈추고 다시 첫 장으로 페이지를 넘겨도, 작품의 향기는 모과처럼 방안을 가득 메운다. 윤리척이고 미학적인 성찰을 통해 긴 여운을 남기는 산문(소설과 수필, 비평 등)과는 달리 시의 문장은, 동일한 효과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다시 소환된다. 요컨대, 작가적 성찰을 집약한 ‘아포리즘’이 아니라, 그 문장 자체로써 말이다. 


이런 뜻에서 시의 마지막 문장은 오히려 작품의 또 다른 상자를 풀 열쇠가 된다. 시는 마지막 문장을 닫고서야 비로소 시를 열린다. ‘나’는 시의 문장을 사물과 사건에 직접 대입하면서 혹은 그 문장을 통해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시의 여정은 생활-속-에서 명확한 실체를 갖게 된다: 나의 감각은 그 문장과 함께 다시 시작된다. 


마지막 문장은 시에 구현된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44)다. 마치 알(卵)이 세포분열을 통해 기관으로 산출되기 이전의 무정형이다. 이제 곧 나타날 의미가 자신의 ‘미래-기관’을 설계하고 자료를 모으며 숙성되고 발효되기 직전의 여명기다. 때문에 마지막 문장은 작품에 내재한 수많은 미로를 한곳으로 집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시인에 따라서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의미가 정착되지 못하도록 해체하기도 하지만.     



그러므로

가장 빛나는 초록은 전속력으로 날아와

벌레 먹은 이파리 속으로 사라진다

─ 박성현,「빛나는 초록은 벌레 먹은 이파리처럼」의 마지막 문장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 문장을 작품에서 의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건축물로 비유할 수 있다. 반면 가장 먼 곳에는 제목과 첫 문장이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마지막 문장을 끝내고서 바로 의미를 직관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또는 이렇다. 제목이 안쪽을 향한 문이라면 마지막 문장은 바깥쪽을 향한 문이다. 첫 문장이 사물과 사건의 은밀한 ‘말’을 옮겨적은 것이라면 마지막 문장은 우리가 다시 여정을 시작하도록 첫 문장의 말들을 과감히 지우는 것이다. 용맹과 명철로 트로이를 함락시킨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이야기가 고향 이타케 섬으로 향한 그날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시의 목소리도 첫 문장이 지워졌을 때, 혹은 우리가 첫 문장으로 되돌아갔을 때 들려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 페르난두 페소아, 「기차에서 내리며」의 마지막 문장45)



마지막에서야 완전히 열리는 시인의 목소리. 그것은 대상을 감싸고 적시며 스며들거나 녹이면서, 우주를 감싼 신성한 그 무엇인 듯 독자를 파고든다. 나는 그 문장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 마치 마크 로스코의 색으로 빨려 들어가는 한 무리의 슬픔처럼 말이다. (*) 






(44) 들뢰즈의 개념: 유기체는 눈, 심장, 폐 등 자신의 기관을 생성하기 전에 일정 기간 분화되지 않는 무정형의 상태─수정란이 첫 번째 세포분열을 시작하여 태아가 되기 전까지의 배아(胚芽)에 놓인다. 

(45)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서』, 민음사, 2018,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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