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마지막 문장, 감동과 여운의 비수
불멸과 소멸의 이중 기호: 마지막 문장의 유형 (1)
마지막 문장의 유형을 살펴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봉인된 규범 혹은 질서와는 전혀 상관없는 카오스 그 자체이며, 시인의 직관에 따라 직조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다만, 굳이 분별하자면 ‘코스모스’와 ‘카오스모스’의 진동이 마지막 문장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작품의 질서를 집중시키는 질서의 창조자로서의 cosmos와 작품의 의미를 붕괴시켜 미학적 충격을 주는 파괴자로서의 caosmos가 공존하는 야누스─전자는 주로 작품의 통일성을 강하게 요청하는 일반 서정시나 러시아 혁명 이후 등장한 미래파 시 등으로, 후자는 개인과 사회의 분열과 해체, 소멸과 분산을 낱낱이 형상화한 과격한 모더니즘 시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1) 불멸, 코스모스의 기호들
무엇보다 코스모스의 기호는 의미의 집중을 통한 세계의 확장을 도모한다. 시인의 의도가 강하게 투사되면서 작품은 견고한 통일성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는 첫째, ‘수미쌍관’과 같이 첫 문장(혹은 첫 연)의 내용을 마지막 문장(혹은 마지막 연)에 다시 등장시켜 의미를 순환・반복시키는 유형이나 둘째, 미스터리 형식을 차용 앞부분에서 해결되지 않은 상황(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결론을 유도하는 유형,셋째, 한껏 고양된 의미를 해소하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마치 트래킹의 마지막 코스에서 뜻하지 않게 주상절리를 마주한 사람처럼 독자를 감동의 여운 속에 무방비하게 방치하는 유형, 넷째, 마당을 쓸 듯 고요하게 작품을 정리하는 유형 등이 있다. 이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첫째 유형이다. 수미쌍관의 법칙을 충분히 활용하여, 작품의 시작과 끝을 순환과 반복 관계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 놓인 첫 문장(혹은 첫 연)과 마지막 문장(혹은 마지막 연)은 형식상 거울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미지가 대칭되는 만큼 의미 또한 더욱 선명해진다. 다만, 동일한 이미지라도 그것이 언제 쓰이느냐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상(象)은 달라진다. 마치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2014년 작, <나를 찾아줘>의 처음과 끝 장면처럼 동일한 이미지라 할지라도 우리의 시각적 경험은 그 양상을 모조리 뒤집을 수 있다. 완전히 다른 이미지가 된다는 것이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기형도, 「안개」의 마지막 문장46)
이 시의 첫 문장은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이다. 샛강을 범람하는 안개, 그것은 그곳의 명물이다. 하지만 안개는 사람들을 완전한 고립 속으로 밀어넣는다. 여공이 은밀하게 겁탈당하고, 둑방에 쓰러진 취객의 죽음은 쓰레기 더미로 취급받는다. 사내 몇몇이 이 폐수의 고장을 벗어났지만 그들은 빠르게 망각될 뿐이다. 아무도 돌아온 사람은 없다.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안개가 걷힌다. 일제히 젖은 총신을 드러내는 공장의 굴뚝. 마치 디스토피아로 붕괴된 기계-소음의 도시 같은.
이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안개를 다시 등장시키면서, 애초 우리에게 각인된 이미지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마지막 연은 이렇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 누구나 조금씩 안개의 주식을 갔고 있다.” 인용한 시의 문장은 이 구절 바로 다음에 온다. 과연 마지막의 안개는 첫 문장의 안개와 동일할까. 아니다. 이미 ‘안개’는 괴물의 축축한 아가리로 변해 있다.
사과가 썩어가는 방향이다
─ 박성현,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의 마지막 문장
이 작품은 공장 노동자의 하루를 회전목마에 빗대어 표현한 시다. 첫 연에서 ‘망가진 시계’, ‘목록’, ‘사과’, ‘웃음’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의 속박된 일과를 그리는데, 첫 연은 이렇다: “망가진 시계처럼 그는 복도에 서 있다가 화장실로 간다 느리게 소변을 보고, 더 느리게 걸으며 더욱 더 느리게 목록을 정리한다 창고에서, 그는 잠시 아스팔트에 떨어진 사과를 생각하는데, (사과는 지구의 공백이다) 그것이 썩어가는 방향에는 웃음이 있다.” 그의 느리고 느린 동작을 보니, 기묘하게도 공장 밖을 나간 적 없는 듯하다.
일하고, 식사를 하고, 동료들과 수다를 떨면서 웃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역시 ‘잔업’이다. 밤이 된다. “그는 캐비닛 세 번째 서랍의,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재고품 목록 속으로 들어가”서는 아무렇지 않게 잠을 청한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망가진 시계처럼 서서 복도를 걸어”간다. 첫 연처럼 공장 바깥을 나간 적이 없는 듯한 모습이다. 어딘가 사과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다음으로 미스터리 형식의 문장을 마지막에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 유형은 사물과 사건에 대한 질문이 있고 이에 대한 답을 내리는 모든 시가 여기에 속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김종삼 시인의 「원정(園丁)」이다.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 김종삼, 「원정(園丁)」의 마지막 문장47)
시의 화자는 소독을 끝낸 과수밭에 있다. 그곳에는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오는/ 유리 온실이 있”다. “아무런 / 기척이 없고 무변(無邊)”한 언덕에서 그는 과실을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 계속 생겨난다. “몇 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이윽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한다: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이 문장을 통해 사람들은 김종삼 시인이 한 치의 타협 없이 그가 지향하는 순수의 세계를 지키려는 의지로 해석한다. 그의 비극적 세계 인식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이 맞든 틀리든, 시인은 자신의 예술과 미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지금-여기와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냈으며, 그 세계의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감각과 사유를 밝히고 있음은 분명하다.
표정이 다 증발하고 없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면 홀려버릴 것 같은
그 얼굴, 남은 테두리까지 긁어먹으며
햇빛은 손톱이 조금 검어졌다
─ 길상호, 「유령의 얼굴」의 마지막 문장48)
이 작품은 화재로 전소된 한 집안의, 쪽마루에 붙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느 날부터인지 “불꽃이 만개했던 그날 이후 흉흉한 소문들만 수시로 드나들던 집”에는 “붙 타 죽은 개들이 서성”이거나 “손톱 빠진 아이들이 나타나서 / 검은 문짝을 밤새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사진 속에 붙박여 점점 희미해지는 여자는 분명 아이들의 어머니이고 개들의 다정한 친구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찔한 반전의 한 문장─“명줄처럼 잘린 가스 배관에서는 / 무거운 흐느낌이 흘러나온다고도 했다.” 이 문장으로 미뤄, 누군가 이 죽음을 준비한 것이다. 위의 마지막 문장은 이를 암시하는데, 표정이 다 증발했다든가, 바라보면 홀려버릴 것 같다든가 하는 부분에서 이 비극의 검은 서사가 나타난다. 특히, “남은 테두리까지 긁어먹으며 / 햇빛은 손톱이 조금 검어졌다”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는 싸늘한 귀기까지 느껴진다. 과연 누가 죽음을 준비한 것일까? 화재로 전소된 집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점점 더 깊어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밤과 낮이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
─ 박성현, 「연민」의 마지막 문장
박성현의 시는 한 장소에 붙박여 있는 여자의 고립을 그리고 있다. 첫 문장부터 떠나고 싶어하는 여자의 은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첫 문장의 “좁은 문을 열면 우체국이다”에서 ‘우체국’이, 중간의 “여자는 아파트 난간에 앉아 뒤엉킨 철로를 바라보다가 가끔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에서 ‘철로’가 그 욕망을 암시한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다 멈추고 한동안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다시 올라”가버린다. 수도 없이 내려가고 올라갔을 그 계단에서 그녀는 또 망설이는 것이다. 햇볕이 가득 펼쳐진 베란다에 앉아 있다가, 봄이 늙기 전에는 기어코 저 햇빛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는다. 하지만, 그녀의 밤과 낮은 다르게 흘러간다. 떠나야 한다는 결심은 언제나 이르거나 여전히 늦다. 시인은 완전히 어긋난, 불연속적이고 결코 마주친 적 없을 ‘밤’과 ‘낮’의 균열에 여자의 시간을 투사하는 것이다.
한편, 감정의 절정에서 맘춰 버린 마지막 문장도 있다. 이것은 여운을 가장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유형으로, 감정이 한층 고양되고 있을 때 갑자기 잘라버림으로써 희열과 아쉬움이 뒤죽박죽 얽히도록 만든다.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는 말의 외로움으로
─ 황동규, 「왕도의 변주 2」의 마지막 문장49)
시인은 의도적으로 문장을 끝맺지 않는다. 이 문장에 걸려 있는 서술어는 ‘달아난다’인데 도치된 것을 인정해도 어딘지 모르게 앞으로 계속 나갈 것 같다. 오래도록 암흑에 파묻힌 문장들이, 그 수줍은 상자들이 조금씩 열리는 기분마저 든다. ‘말의 외로움’이란 그 중심에 깃든 꿈일까. 황동규 시인은 급격한 여운을 남김으로써 시의 또 다른 문을 연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 기형도, 「오래된 書籍」의 마지막 문장50)
고백하자면, 나는 한동안 못처럼 이 마지막 문장에 붙박여 있었다. 아무리 머릿속과 귀를 털어도, 그 울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복학하고서야 겨우 멈췄지만, 예기치 않은 곳에서 갑자기 떠오른다. 이 문장은 내가 시의 첫 문장을 밀어내도록 은밀하게 추동할 때도 있다. 그만큼 강렬하게 살아남아서 꿈틀거린다. 아마 많은 시인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리라.
시인의 이 작품은 첫 문장을 마지막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요컨대,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 기적적이었다”라는 문장이 인용 문장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기적’이라는 키워드가 그를 요약하는 유일한 단어로 확정되는 순간, 그의 실존을 죽음을 향해 열린다. 시인에게 기적이란 그러한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 시절을 이끌었던 의지였지만, 이제는 그것도 오래된 서적과 같이,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채 바스라지기 직전이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믿지 않는 것처럼, 기적에 한 발 더 다가선다.
어떤 장면은 바라보지 않아도
멀리서 ‘내’가 오고 있었다
─ 한인준, 「유적」의 마지막 문장51)
한인준의 시는 문장을 파격한다. 시가전이 시작된 유령도시처럼 허물어진 채 포화에 잠겨 있는 듯하다. 이미 많은 부분이 무너져 있거나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것도 있다. 문장 성분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었으므로 독자는 사라진 부분을 나름대로 유추해 복원해야 한다. 물론 어려울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나마 위의 시는 그 양상이 온건하다.
이 시는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는데 // 멀리서 ‘내’가 오고 있었다.”로 시작한다. 바로 “나를 따라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면서 나는 바닥에 배낭을 내버려 두었다”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여기서 ‘나’는 주체가 아니며, 시인이 기다리는 목적어다. 그래서인지 일인칭과 삼인칭의 교묘한 착시도 보인다. 요컨대, 나는 드디어 도착했지만 아직 ‘나’는 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불가해한 상황을 시인은 마지막 문장에서도 의도적으로 반복한다. 이미 도착한 ‘나’와, 아직 오지 않는 ‘나’, 그리고 여전히 멀리서 오고 있는 ‘나’의 분열은 ‘이미’와 ‘아직’과 ‘여전히’의 거리만큼이나 미묘하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대단원을 마당에 내려앉은 햇볕을 쓸어내듯 사각사각 정리하는 문장이다. 이것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다만, 조심할 것은 절대로 중언부언한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순환과 반복일지라도 각기 다른 맥락과 의미를 통해 전개되어야 한다. 산문처럼 시인의 의도를 은연중에 요약하거나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실패한다. 또한 충분히 숙성시키지 못하고 서둘러 닫는다는 느낌도 안 된다. 이것은 시인과 작품에 대한 믿음을 반감시킨다.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며, 끝내 떠오르지 않을 그 저녁 속에서
검은 은행나무 물결에 그림자처럼 흔들리고
혼자서 오랫동안 집을 지었을 쪽방 속 계집애는 하염없이 불을 켠다
─ 이승희, 「내 마음의 수몰지구」의 마지막 문장52)
‘수몰지구’가 상징하는 것처럼, 시인은 마음 한 곳에 결계를 치고, 그것도 모자라 수몰시켜 버린다. 그의 마음에 슬픔이 얼마만큼 깊은지, 그리고 그 가늠할 길 없는 무게에 눌려 콘크리트처럼 딱딱해졌는지, 그는 첫 문장에서부터 “더이상 자라지 않는 그늘”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빛인지 불빛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어둡고 차가운 한가운데”다. 시인은, 폐화수정하는 여자의, 불가항력적인 내력이 그 수몰지구에 남아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며, 끝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검은 은행나무 물결’처럼 “혼자서 오랫동안 집을 지었을 쪽방 속 계집애”를 떠올린다. 하지만 여자의 고립과 울음을 가둔 물속은 검고 어둡고 냉랭하다.
뜨거운 종이 한 장에 멈춘 숨
서늘한 무아지경이
소리로 가득찬 액정의 도시로 건너온다
─ 강신애, 「푸른 옷의 연인」의 마지막 문장53)
강신애 시인은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창가 햇빛에 불거진 힘줄은 / 두 손으로 받친 / 편지 한 장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 (중략) // 홍조 띤 뺨 너머 / 벽에 걸린 세계지도는 / 그녀를 먼 나라로 데려간다.” 그렇다. 푸른 옷의 여인은 이미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숱한 경유지만 존재하는, 목적지 없는 여행이 그녀의 ‘목적’이다.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지구처럼, 그녀는 오직 ‘그곳’으로 빠르게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위 인용문 바로 윗부분에 쓰여 있듯, “애착도 은유도 없는 메일과 문자들”을 삭제하는 것만이 그녀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신기루, 그렇다. 지금 여기의 삶은 신기루처럼 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무아지경의 서늘한 감정으로, 이 ‘액정의 도시’를 건너갈 것이 분명하다.
없는 손도 하나의 자세─
이것은 밤이 아니어서 언제나 밤일 뿐인
─ 박성현, 「없는 손」의 마지막 문장
이 시는 자신의 손이 사라졌다고 믿는, 환각에 빠진 한 남자를 그리고 있다. 그는 이를 증명하려 매일 사과를 놓친다. 떨어진 사과는 복도를 굴러가며 그의 ‘없는 손’을 빤히 쳐다보지만, 그는 아랑곳없다. 그에게 ‘없는 손’이란 상처 없는 ‘통증’, 혹은 기억에서 사라진 엽서의 발신지다. 그는 손이 없다. 물론 그것은 그의 주장일 뿐 확인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그는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연기를 한다. 손이 없어도 생활은 전혀 지장이 없다는 제스쳐. 그는 ‘없는 손’에서 자세를 끄집어낸다. 그는 밤이 아니어서 언제나 밤일 뿐인, 어쩌면 신체를 강탈당한 채 버려진 나는 ‘없는 손’의 일부일지 모른다. (계속)
(46) 기형도, 『기형도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35쪽.
(47) 김종삼, 『김종삼전집』, 청하, 1988, 95쪽.
(48) 길상호,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걷는사람, 2919, 59쪽.
(49) 황동규, 『황동규시전집1』, 문학과지성사, 1998, 164쪽.
(50) 기형도, 앞의 책, 47쪽
(51) 한인준, 『아름다운 그런데』, 창작과비평사, 2017, 53쪽
(52) 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82쪽
(53) 강신애,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문학동네, 2020, 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