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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May 03. 2024

항루원, 하롱 베이의 고요

제5장 마지막 문장, 감동과 여운의 비수

[시 창작 에피소드 #5] 


항루원, 하롱 베이의 고요




나는 폭염의 한가운데다. 만일,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겠지만, 적도 부근의 기상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짙은 녹색의 바다는 기름을 잔뜩 먹은 듯 고요하고 우리와 전혀 무관한 채로 저 앞에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침묵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갑판을 서성거렸지만, 우리를 목적지까지 태우고 갈 배는 보이지 않는다.      



벼랑은 허공에 매달려 있고, 

나무는 오래도록 수평으로 뻗어 있다. 

가파르거나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내 발에 모과 한 알이 툭 떨어졌다. 

오래도록 그 냄새를 씹었지만, 

마음을 비켜 선 것들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새로 구두를 장만하고 오래 걸어 다닌 바다였다. 

— 박성현, 「항루원에서」 전문     



나는,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이 되었던 ‘항루원’을 보기 위해서 베트남에 도착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다. 하롱 베이는 삼천여 개의 섬들이 바다 위에 거친 수묵처럼 흩어져 있다. 신이 흘린 눈물이 바다 위에 떨어져 섬이 되었거나, 아니면 용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해도(‘하롱 베이’의 원뜻이다), 항루원 하나라면 모조리 갚고 남음이 있다. 세계가 그곳으로 빨려들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갈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배에 올랐다. 한 팔도 안 되는 높이에서도 녹색의 바다는 이방인이 결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단단히 여물어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손을 뻗어 차고 매끄러운 살을 만지는 동안, 배는 항루원의 유일한 진입로로 들어가고 있다. 바다도 이 길을 따르지 않으면 갈 수 없다. 하늘로 솟은 절벽에서 원숭이 우는 소리가 난다. 벼랑에 뿌리 내린 나무들 사이로 퍼지는 저 길고 긴 울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때 누군가 섬이 기운다고 속삭였다. 난청에 휩싸인 듯 일제히 숨을 멈추고, 심장에서 새파랗게 녹이 슨 청동거울을 끄집어냈다. 백 발의 강마른 여자가 순간 튀어나와 뒤엉키며, 내 눈 속에 긴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세월이 숱하게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숨을 멈추게 한다. 원숭이가 날카롭게 울어대는 숲, 바람을 따라 흐르는 나무와 녹색바다의 숨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을 가두지 않고 되돌려주는 깎아지른 섬의 벽창, 나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나만의 사원이자 시이고, 종교다. 이것이 하롱 베이가 그녀를 수천 년이나 감춰왔던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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