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성현 Apr 26. 2024

불멸과 소멸의
이중 기호: 마지막 문장의 유형 (2)

제5장 마지막 문장, 감동과 여운의 비수

(계속)


불멸과 소멸의 이중 기호: 마지막 문장의 유형 (2)




(2) 소멸카오스모스의 기호들     


이 카오스모스는 의미 산출(혹은 증식)을 아예 배제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과격하다. 보통의 결심으로는 이 기호들을 마지막 문장으로 배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자칫 작품이 스스로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유형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맥락이 거세된, 앞의 흐름과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은 문장이나 기호들을 배치하거나 다른 하나는 낯설게 하기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다른 장르로 건너간다든지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처럼 시인이 작품에 개입하는 것이다.      


우선 맥락을 지웠거나 혹은 의식의 흐름으로 무질서하게 돌출되는 문장을 보자물론 어떠한 경우도 맥락은 사라지지 않으며 또 다른 맥락으로 루트를 확장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전의 맥락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 이승훈, 「사물A」의 마지막 문장54)     


이 글 속에 이 언어 속에 아무것도 없는 언어 속에 부재 속에 무 속에 내가 있도다

─ 이승훈, 「텍스트로서의 삶」의 마지막 문장55)     



이승훈 시인은 첫 시집부터 파격을 양식화한다. 그가 평생 꿈꿨던 ‘시가 아닌 것’들이 시로서 구원되는 세계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물 A」는 시인의 감각에 부딪친 수많은 사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식에 침투하고, 그것이 언어로 변환되며 종국에는 시로 정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첫 문장에서, 느닷없이 한 사내의 팔이 달아나고 흰 닭 한 마리가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거의 돌출된다고 보면 맞겠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증식하는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우고 만다. 이러한 사태는 인간의 의식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아이러니다. 결국 닭들은 흰 약체로 변한다. 그런데 또 느닷없이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이 마지막 문장은 첫문장을 오마주하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또한 「텍스트로서의 삶」은 시를 쓰는 주체, 곧 ‘시인’이란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는 첫 문장에서 “나는 없고 언어만 있으니 나라는 언어가 나를 만든다”는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던진다. ‘나’는, 과연 시를 움직이는 주체인가, 아니면 단지 언어가 명령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뿐인가. ‘나’는 언어 속에 있지만, 동시에 양말 속에 있고, 스웨터 속에도, 당신의 스타킹 속에도 있다. 언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없지만, 나라는 물리적 실체는 명징하고, 욕망이 있으며 나이까지 먹는다. 부재하는 만큼 현존하며, 현존하는 만큼 부재한다. 이 수수께끼는 왜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혹은, 나는 왜 이 수수께끼를 버리지 못하는가. 답은 없다. 분명 언어에는 그 어떤 실체도 없지만, ‘나’로 명명되는 무엇인가는 언어의 부재 속에서도 지금-여기를 활보한다.     


다음으로 언어 예술을 멀티로 확장해 장르를 건너가거나 시인이 작품에 직접 개입하는 경우도 있다오늘날의 시는 유독 ‘장르-건너가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이미 1930년대 이상의 시에서 이러한 파격이 진행되었고, 1950년대 조향, 송욱, 김수영 등 일군의 시인이 그 파격을 계승했다. 특히 1980년대는 영상 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매체의 혼종이 더욱 일상화된다. 그 첫머리에 황지우 시인이 있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 : 83. 4. 1. ~지 : 83. 5. 31.

─ 황지우, 「벽・1」의 마지막 문장(이자 전문)56)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 황지우, 「벽・2」의 마지막 문장57)     


그러나 그 위로 다시 갤러그 3개 편대가 내려와 5천 메가톤급 고성능 핵미사일을 집중 투하, 집중 투하!  

  

─ 황지우, 「徐伐, 셔바ᆞ갈, 셔ᄫᆞ갈, 서울, SEOUL」의 마지막 문장58)        




─ 황지우, 「묵념, 5분 27초」의 마지막 문장59)     



황지우 시인의 장르 건너기는 과격하다. 「벽・1」은 관공서에서나 볼 수 있는 ‘공보물’을 그대로 가져왔고, 「벽・2」는 동요의 한 구절이다. 세 번째 인용시는 음표라는 소리-기호를 삽입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장르는 게임의 효과음이다. 마지막 인용시는 제목만 있고 내용은 비어 있다. 제목이 암시하는바, 일종의 퍼포먼스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데 한번 해보면 그 참담한 효과를 서서히 알 수 있다. 


위 작품 모두 당시도 그렇지만 지금 읽어도 지나친 파격이다. 이것이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가당찮은 논의도 있었다. 시인은 시작 메모에서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고 선언한 바 있는데, 위의 예들은 정확히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파격’이란 언어 예술에 대한 파괴에 접근하며, ‘장르 건너기’(혹은 이종 교배)를 통해서 비로서 비(非)-시를 ‘시’로 완성한다.          



─ 이승훈, 「준이와 나」의 마지막 문장(이자 전문이고 이미지뿐인)60)



이승훈 시인은 또 멀리 가버린다. ‘준이와 나’라는 제목에 사진 한 장만 붙이고 끝낸 것이다. 이 작품은 시인이 지속적으로 읊었던 “이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주문(呪文)의 최종 장이 아닐까.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된다. 시가 아닌 것이 시가 되는, 요컨대 비(非)-시의 ‘시’화가 발산하는 놀라운 효과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은 없으므로, 또한 마지막 문장은 독자의 수만큼이나 수천수만 개로 갈라져 버린다. 


이와 더불어 2004년경부터 창작되기 시작한 ‘디카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이 용어를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영상을 포착하여 찍은 사진과 함께 문자로 표현한 시’로 정의한다. ‘언어-예술’에 국한된 시의 범주를 확장해 이미지와 텍스트가 결합한 ‘멀티-언어예술’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디카시는 영상과 텍스트의 변증을 통해 한겹 두꺼운 옷을 입고 의식의 깊은 곳을 침전되며, 독자는 기억과 충격을 통해 그 의미 층을 꺼내어 자신의 내면에 각인시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영상에 텍스트가 입혀졌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한 시인 고유의 해석이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그만큼 그 사물에 대한 의미 지평이 넓어졌다는 얘기다. 여기서 모태가 변이로 확장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생성될 수 있으며, 그 반대 과정도 역시 동일하게 전개될 것이다.”61)   



입동 무렵 단풍나무 한 채, 

바싹 물이 오른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 박성현, 「입동 무렵 단풍나무 한 채」의 마지막 문장     



물론 배치에 따라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건너오거나 아니면 반대로 사진에서 문장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지 장르 간의 육탈(肉脫)은 불가피하다. “바싹 물이 오른 지느러미”는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뒤집는 단풍이며, 사진은 그 순간적 멈춤을 포착한다. 


한편 시인이나 독자가 개입하는 문장도 있다.      



그러게, 그게 뭘까?

─ 장이지, 「커피포트」의 마지막 문장62)     



시의 화자는 “이건 아는 아이의 이야기”라고 전제하면서, 대학 때 좋아했던 한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남학생은 아는 것이 많았고, 자기와는 취미도 비슷해서 그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끌리기 시작했다는데, 네 번째 만나는 날에는 동문회에서 들고 왔다며 커피포트를 건네주기도 했다지. 매일 문자나 주고받다가, 다섯 번째는 드디어 자기 집에서 보자고 했는데, 그 역사의 날에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거지. 전화도 받지 않아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조마조마했지만 집을 모르니 가볼 수도 없고 그걸로 끝났다는 거야. 십년도 더 지난 얘기지만, ‘아는 아이’는 여전히 ‘커피포트’를 궁금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네. “그 커피포트는 뭐였을까?”


그 ‘아는 아이’의 물음은 혼잣말일 수도, 아니면 화자에게 건네는 사소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화자는 아는 아이의 말을 되받아 “그러게 그게 뭘까?”라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표면상으로 목소리는 두 갈래로 찢어진다. 하나는 화자의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는 아이’의 목소리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는 그 긴장 관계가 어긋나버린다. 갑자기 뒤틀리는 시간의 틈─그 되받는 물음에는 시인과 독자의 목소리가 여러 방향에서 뻗어 나오며 중첩된 것이다. (*)





(54) 이승훈, 『사물 A』, 삼애사, 1969, 54쪽.

(55) 이승훈, 『너라는 햇빛』, 세계사, 2000, 56쪽. 

(56) 황지우, 앞의 책, 67쪽.

(57) 황지우, 앞의 책, 117쪽.

(58) 황지우, 앞의 책, 71쪽.

(59) 황지우, 앞의 책, 81쪽. 이 작품에는 본문이 없다

(60) 이승훈, 「준이와 나」, 『현대시사상』 1996년 겨울호 수록.

(61) 박성현, 「기억의 현상학, 혹은 순수한 전(前)-미래적 사건의 도래」, 『시인수첩』 2023년 봄호, 169쪽.

(62) 장이지, 『레몬옐로』, 문학동네, 2918, 58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