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박성현
가늘고 두꺼운 흰 띠를 둘렀지만 대체로 붉은색이다 장미를 찔러 넣으면 가시가 돋을 것 같았다 사촌들은 머리와 사지가 없는 이 덩어리를 벽에 걸어야 하는데 대못이 없다고 투덜댄다 꽃다발을 뒤집어 말리는 것이 향기를 오래 잡아두는 것이라 했다 낮술을 잔뜩 마시고 철공소 쪽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뻗은 바탕을 발굽으로 꾹꾹 눌렀다 누른 자국마다 붉은 가시가 부풀었다 나는 내 덩어리가 대못에 박히는 악몽에 대해 오래도록 물었다 오늘이라 생각한 날은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사촌들도 이미 죽거나 사라졌다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수록
[以後, 시작노트] 낮술을 마시고 철공소로 걸어갔다. 우기가 지나갔지만 끈적끈적한 이 대기는 도무지 적응하기 어렵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땅에 스며든 습기는 무겁게 휘발했다. 낮술을 마시면서 사촌들은 '없는 몸'에 대해 투덜거렸다. 이마에 여드름이 잔뜩 돋아 대체로 붉은 낯빛인 이종은 장미가 녹이 슬면서 부풀어오르는 철근 뭉치 같다고 말했다. 푸줏간에서 일하는 사촌은 머리와 사지가 없는 덩어리를 벽에 걸어야 하는데 대못이 없다고,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나는 고상한 척, '향기'에 대해 떠들어댔다. 꽃을 거꾸로 매달아서 말려야 해, 베드로처럼. 사촌들과 낮술을 마시고 나는 철공소로 걸어갔다. 사촌들은 자기 일터를 향했다. 우기가 지났어도 습기는 땅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걸을 때마다 발굽이 찍혔다.어쩌면 돼지가 수컥수컥 땅을 파헤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밤에, 나는 머리와 사지가 잘려나간 내 덩어리를 보기 좋게 대못에 걸어 놓는 꿈을 꾸었다. 잠시 눈이 멀어 옛날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라 생각한 날도 지나갔다. 먼 곳에 있는 사촌들은 이미 죽거나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