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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by 박성현






수선화



박성현





수선화가 피었다 발가벗은 백발이 끓어올랐다 옛날의 저녁이 다녀갔다 옛날의 저녁은 바스락거리며 혼자 기웃거렸다 손가락을 움켜쥘 때마다 우산이 물컹거렸다 수선화가 피었다 눈을 활짝 열고 창틀에 고인 빗방울과 그늘을 지켜봤다 여름이 가고 또 다른 여름이 갔다 짧은 엽서도 없는 계절이었다 라디오는 식은 밥처럼 차가웠다 저 플라스틱 상자는 언제쯤 노래를 흥얼거릴까 오래도록 당신이 앉아 있던 자리가 희고 간결했다 희고 간결해서 아주 멀었다 나는 내 발목을 움켜쥐었던 빗방울과 그늘을 뒤척였다 다시 수선화가 피었다 옛날의 저녁이 기척도 없이 다녀갔다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문학수첩, 2020. 수록








[以後, 시작노트] 수선화가 피었다. 하늘이 모조리 내려앉은 수면 위에 순백의 구름이 솟았다. 수선화가 피었을 때 숨어 있던 백발도 끓어올랐다. 백발은 맹렬하고 단순했지만, 그가 바라보는 저녁은 두껍고 거칠고 한없이 느렸다. 느티나무 한 채가 못처럼 황혼에 박혀 녹슬어 갔다. 농부의 손이, 양철지붕 위에 쏟아지는 햇빛을, 그 메마른 건초더미를 쓸어냈다. 수선화가 피었다. 백발은 잠에서 깨어 눈을 활짝 열었다. 햇빛이 쏟아진 줄 알았는데 그것은 늦은 봄의 짧은 소나기였다. 물비린내가 가득한 여름이 갔다. 가을은 희미해지면서 서쪽으로 물러났다. 라디오에서 수취인불명의 노래들이 흘렀다. 라디오는 당신이 있던 자리에 그 노래들을 심었다. 수선화가 피었다. 내 발목을 움켜쥐던 빗방울과 그늘이 서로 뒤척였다. 옛날의 저녁이 다녀갔는데 아무도 그 색깔을 기억하지 못했다.(*)








*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cloropy/222808906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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