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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by 박성현






넙치


박성현




넙치가 좌판에 펼쳐져 있다 한 발은 바닥을 딛고 또 한 발은 계단을 오르는 자세다 태어나면서부터 굳어가는 두 팔을 겨우 흐느적거리고 있지만, 마르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어깨에 걸쳐 멘 공구박스 속에서 붉은 칸나가 녹았다 두 귓속을 파고드는 소리의 찌꺼기들, 넙치는 열쇠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주머니에 넣었다 계단이 접힌 곳에 슬그머니 죽은 앵무새를 놓았다 골목에는 버려진 신발이 가득했다 벗겨진 가면처럼 웃으며 밤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수록







[以後, 시작노트] 나는 넙치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살고 있다. 물론 '바닥'이란 정치적 이념이나 문화적 은유가 아니다. 그야말로 '바닥'이다. 그 '바닥'이 어디든, 아스팔트나 횡단보도든, 아니면 갯벌이나 모래사장이든. 나의 생활은 비교적 간결하다. 5시 무렵에 눈을 뜨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작은 방으로 가서는 컴퓨터를 켜고 작업을 시작한다. 아침을 먹고 약을 들이키고, 다시 작업을 하다가 침대로 가 눈을 붙인다. 오전이 지나간다. 바깥 출입을 금지했으므로(넙치는 웬만해서 문을 나서지 않는다) 나는 워킹머신을 걷는다. 3과 3.5 사이에 고정되는 나의 속도는 느리지 않고, 한가하지도 않다. 꾸준한 속도, 꾸준한 반복이 내 폐와 심장에 규칙을 허용한다. 멀리 가지 않았으나 땀에 젖는다. 샤워를 하고 거울을 본다. 넙치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넙치다. 음악을 들으면서 독서를 한다. 독서를 하면서 반드시 음악을 듣는다. 나의 음악은 독서에 머물러 있다. 어두워지면 불을 켠다. 어둡지 않으면 불을 켜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쓴 첫 문장: "나는 넙치다." 나는 넙치이므로 우울하지 않다. 그럴 시간도 없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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