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박성현
서리가 내렸다 벚나무 밑이 아득했다 구름이 능선을 넘어가다 자꾸 뒤를 돌아봤다 늦은 봄이 구름을 보채면서 앞서갔다 돌아와 나무랄 때도 있었다 서리가 내렸다 묵은눈에 햇볕이 고였다 벚나무가 능선을 넘어가는 구름을 보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서리가 내려 벚나무만 온통 붉어졌다 평상에 앉은 노인들이 내기 장기를 두다가 사라졌다 자취를 물어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저녁을 먹다 말고 무심코 문을 열었다 구름이 능선을 넘어가다 멈춰 서 있었는데 벚나무는 빨리 가라고 연신 손사래를 쳤다 곡우 무렵 찾아온 손님들이 며칠 놀다 떠난 자리에 밤새 서리가 내렸다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문학수첩, 2020. 수록
[以後, 시작노트] 내가 태어난 날은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다. 가을의 끝물이고, 아직 거둬들이지 못한 낱알이나 열매들이 마지막일지 모를 때를 기다리는 무렵이기도 하다. 끝까지 어떤 쓸모를 기대하면서. 희망의 작은 조각이라도 붙들고 싶어서. 하지만 남겨진 것들은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른다. 어릴 적이다. 대청에 누워 밤하늘을 보다가 별빛 가득한 어둠 속에 손을 넣었다. 나는 모래시계처럼 쏟아지는 시간을 휘휘 저으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무수한 빛의 알갱이들을 뒤척였다. 어쩌면 이 알갱이들이 떨어져 땅에 박힌 것이 서리가 아닐까. 할아버지에게 묻고 싶었지만, 구름은 능선을 넘다말고 벚나무만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다. 그 사이, 내기 장기를 두던 할아버지가 바쁘게 사라졌다. 자취를 물어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