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서쪽

by 박성현






식물의 서쪽


박성현




식물이 창백한 표정을 짓는다


저 식물의 잎에 그 잎만큼의 넓이로 알몸을 비볐던 바람이 가만히 멈추어 그 표정의 안쪽을 살펴본다


비어 있으므로, 서쪽은 그늘이다 그늘의 호수다


사람이 걸어가고 호수가 뒤척인다 발자국이 뒤엉켜 반쯤 넋 나간 얼굴로 무딘 무릎을 세우고 있다


사람의 뒤에서 문이 닫힌다 햇빛 쏟아지는 창문으로 식물이 기울어진다


그늘이 오그라들며 호두처럼 단단해진다


식물의 고단한 오후가 드나들던 서쪽은 무자위*가 멈추는 순간이다


사람의 입술이 석류의 그것처럼 툭, 벌어진다








* 수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수록








[以後, 시작노트] 햇빛이 내린다. 햇빛이 맹렬히 내려 지상은 이미 한증막처럼 수증기에 갇혀 있다. 햇빛이 내리고,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출렁인다. 나는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빌딩 속으로 들어간다. 로비에서 방금 서 있던 곳을 바라본다. 살을 에일 만큼의 침묵으로 가득하다. 무겁고 빠르고 단단하다. 어디선가 물비린내가 난다. 나는 내 몸에 물이 고여 썩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그 냄새는 부패가 아닌 그리움이다. 로비 한쪽 벽면 전체를 넝쿨이 뒤덮고 있다. 바닥에서 시작되어 올라오고 사선으로 뒤엉켜 있다. 나는 식물의 아주 밝은 주황에 가까이 가서는 그 두툼한 초록을 오래 바라본다. 폭염이 끈질기게 머무른 자리에 유화처럼 덧칠되는 염천의 소나기. 타오르다 식어버리는 그 단순한 반복의 냄새. 나는 단지 바라보기만 한 것뿐인데, 식물을 타고 흘러오는 물의 미세한 박동을 느끼고 말았다.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