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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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이 예술을 이해하고 작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논리의 회로를 넘어서 있는, 인간의 사유와 감각을 집대성한 불가해의 영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컴퓨터가 시를 쓴다는 것을 일종의 의인화된 비유로 여겼으며,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집약된 인공지능이라 할지라도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예술’이라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일말의 숭고함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발소 작품조차 작가의 놀라운 지성이 작용한 결과이며 또한 인간을 제외한 그 무엇도 예술이라는 미학적 사유와 감각에 다다를 수 없다고 의식적/의도적으로 믿는다. 예술은 인간에게 고유한 이른바 대체 불가의 종교적 엄숙함이며 신이 인간에게 내린 직접적인 축복이기 때문에, 단지 기계에 불과한 컴퓨터/인공지능은 인간이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온 예술이라는 ‘영원한 미완의 행성’에는 이를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여명기 근대의, 데카르트가 통찰한 이성 우위의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연동되는바, 예술이 (주술처럼) ‘신’에게 접속하는 엄숙한 의례에서 ‘개인’으로 텔레포트-되는 과정 전체를 압축한다. 믿는 자를 위한 신은 근대를 거치면서 예술로 이름을 바꿨고, 공동체의 집단지성은 개인의 코기토cogito로 압축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시 또한 내재율이 강조됨과 동시에 산문시를 실험하기 시작한다.
인공지능이 시를 쓴다. 사건을 생산하고 그것을 소설로 엮어낸다. 선과 색을 조합해 그림을 그리고 소리를 재단하여 음과 율을 만든다. 이미 헐리우드는 초기 단계의 시나리오 작업을 인공지능에 맡기고 있다. 우리가 예술로 부르는/부를 수 있는 장르들이 ‘쳇gpt’와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에 의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예술이 신을 대체한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바, 믿음에 기반을 둔 확신은 믿음이 제거되었을 때는 손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우리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정제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믿음과 확신은 오히려 과도한 욕심이자 지나친 자만일지 모르겠다.
시를 쓴다는 것, 혹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음악을 만드는 것은 존재의 실존적 증거이지만 끊임없이 스스로를 분화하는 지성의 작용이기도 하다. 섣불리 시의 죽음을 말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시는 호메로스가 운용하던 문장과는 완전히 다르며, 북해와 한반도의 서정시가 ‘시’라는 개념으로 묶일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시를 쓴다는 것, 그것은 당대의 생활이 만드는 살아 있는 호흡이다.
돌이켜보면, 과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민담을 유형별로 나누고 그 시스템을 단순화시켜 민담의 지도를 제작했고(대부분의 이야기는 이 구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미국의 신비평가들이 시의 미학적 창발을 일곱 가지 유형으로 형해화했다. 과학적 성찰이 미학적 통증을 압도한 것인데, 물론 시를 둘러싼 사태가 이런 식으로 전개됐어도 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인공지능 시도 마찬가지. 자신이 학습한 바에 따라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간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벗어나지는 않겠지만─으로 작품을 생산할 것이다. 이때 시는 신의 눈동자 없는 그야말로 텅 빈 시선을 발견할 것이며, 그리하여 오로지 언어로만 축성되는, 사물의 부재와 결핍으로 점철되는 가장 순수한 장르에 닿을 것이다.
2
‘쳇gpt’가 등장하기 직전, 인공지능은 ‘딥 러닝’의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적-지능의 가능성을 열었다. 인간의 뇌와 유사한 인공신경망을 구축하고 거기서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일반적인 규칙을 훈련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인공지능은 그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바둑’을 점령한다. 뿐만 아니다. 교육이나 의료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의 활동 영역은 인공지능 없이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정도다. 세계는 이미 지각변동을 시작했으며 그 양상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는 비교도 안 된다.
이런 비유가 가능하다면, 우리 인간이라는 수만 년을 지속한 ‘영구동토층’이 녹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불과 사반세기 전 혁명으로까지 격상된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간의 사유와 감각은 무한히 확장되기 시작했고, 아울러 ‘내 손 안의 컴퓨터’를 모토로 삼았던 스마트폰의 등장은 그 방법과 절차를 손쉽게 만들어,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무색하게 만드는 엄밀한 의미의 ‘개인’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혁명-기계는 여전히 매체라는 도구적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요컨대, 우리는 컴퓨터 화면에 창을 띄우고, 문제를 입력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답을 기다린다. 물론 그 ‘답’이란 인터넷이 스스로의 언어와 지능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답에 대해) 인간이 입력한 웹 사이트를 연결하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보다 많은 그리고 보다 정교한 답을 빠르게 찾아내고 빈틈없이 접속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터넷은 연결-기계다.
그러나 ‘쳇gpt’와 같은 대화형 인공지능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기존의 인공지능과는 다르다. 인간과 접속하고 인간의 언어를 기반으로 소통한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스스로 문제를 활성화하고 연구하며 해답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쳇gpt’는 앎에 대한 또 다른 혁명의 장에 진입한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로써 의인화된 실체가 아니라 의인(擬人) 그 자체가 된다. 다만, 지금 언급된 ‘인간’이란 공동체에 기반한 집단-지성보다는 철저하게 개별화된, 거의 나르키소스에 가깝고, 라이프니츠의 단자에 준하는 개인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팬데믹과 함께 노출되기를 꺼려하는 폐쇄적 분위기가 한몫한 것은 분명하지만, ‘쳇gpt’ 같은 인공의 대화-기계는 그것을 전에 없이 가속할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사유와 감각의 총체이자 이에 대한 결집이다. 그리고 사유와 감각이란 인간이 세계를 지켜보고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내면화하는, 다시 말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부동의 고리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인공지능의 언어도 그/그것과 세계를 연결하는 사유와 감각을 압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언어, 세계는 정교하게 얽혀 있으며 미세한 변화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순환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인용하지 않아도,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변화는 반드시 언어의 존재-방식과 인간의 인지-프레임 변화로 이어진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그렇지 않은 세대와는 다르게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언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변화된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화두는 좀 더 분명해진다. ‘시’는 그 언어의 사용 주체에 귀속되지 않으며, 오로지 언어의 존재 방식으로 예각된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인간 고유의 사유와 감각은 그 분기점이 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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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죽음은 예술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집착과 독점적 구조의 붕괴를 뜻한다. 그러나 시의 죽음이 시의 소멸로 이어진다고 믿는 것은 아직은 지나친 생각이다. 언어의 가장 먼 곳에 문학이 있었다는 익숙한 경험에 따라 항상 존재했던 시의 죽음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여정으로써 우리에게 열리는 시작 점이 아닐까. 지옥을 향한 오르페우스처럼 시는 그 의지와 함께 실존 너머로 향할 것이다. 가장 멀리서 오는 눈(目)의, 저 까마득한 ‘에포프테이아’(깊은 응시, epopteia)가 바로 시의 죽음과 동시에 우리의 심장을 움켜쥘 것이다.
푸코는 이렇게 선언한다; “만일 그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지기에 이른다면,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이 만약 우리가 기껏해야 가능하다고만 예감할 수 있을 뿐이고 지금으로서는 형태가 무엇일지도,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대화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시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언어가 존재하는 한 시는 지속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시가 모래사장에 그린 얼굴처럼 물러날지라도 그 끝에서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언어의 광활한 대지에서 ‘시’라는 심장은 결코 죽지 않는다. (*)
*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526쪽.
** 이 글은 계간 <시인수첩> 2023년 여름호(통권 77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이제 무용하다. 그들은 이미 습득한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인공지능이 쓴 시를 과연 '시'로 인정할 수 있을까?"
만일 그 문장들을 '시'로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과도한 교만이 투영된 것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된다. 애초에 시는 신과 소통하는 언어였으니, 시를 짓는다는 것은 바로 신의 언어를 인간의 삶으로 옮기는 일이며, 이때 인간은 지금의 인공지능과 동일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시로 인정한다면 상당한 논란이 따르게 된다. 누가 썼든, 그 문장들이 시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을 때 반드시 '가치 평가'라는 비평의 영역을 관통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문장의 주체는 지워진다. 바르트가 말했던 '저자의 죽음'을, 우리는 감정을 배제한 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는 인공지능의 문장들을 시로 인정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