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방, 그 심연에 깃든 회색과 함께

산문

by 박성현






나의 방, 그 심연에 깃든 회색과 함께



박성현




나는 지금 아프다. 굳이 ‘지금’이라는 단어를 쓴 까닭은, 언젠가는 혹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게 속한 육체와 마음의 마디들을 손쉽게 분절하고, 그것의 쓸모를 활용해 나의 움직임과 멈춤, 그리고 그 상호작용과 결과들을 충분히 용인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에 함의된, 어찌 보면 나의 방이라는 ‘장소’의 운명이겠다. 요컨대, ‘나’를 분절하고, 그 쓸모를 이끌어내며 내게로 되돌려주어 나로 하여금 세계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작은 구실이라도 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나는 그 운명 속에서 세계의 흐름이자 물결이고, 한 순간으로 구성되도록 배치하는 것이다. 연못에 수련이 피듯, 연못가를 산책하던 화가가 수련의 유일한 목격자로 남듯, 나의 방은 빛과 색채가 없는 지금의 ‘나’를 보는 유일한 황혼이다.


조금 전 나는 ‘아프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 표현은 병(病)을 은폐할 뿐이다. 정확한 병명 없이 단지 징후와 증세로써만 표출되는 이 모호한 고통과 통증에 대해 지금의 나는 그 어떤 답도 없으며 무방비다. 균열, 돌출, 압화, 가역, 몽환, 추상, 잿빛 혹은 화염과 암묵(暗黙)…… 그 어떤 이름을 붙여도 나에게 병은 배후로서의 ‘나’다. 가면이라 믿었던 얼굴이 실제 그 사람의 근육과 피부가 만들어내는 진짜 얼굴일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처럼, 병의 실재는 ‘나의 방’과도 같이 유일하면서도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의 ‘배반’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아픈 이유는 나의 방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회색’ 때문일지 모르겠다. 회색에 닿았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뭄이 들고 척박해지며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함몰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는 황혼이 지나가는 ‘나의 방’의 저 웅크린 회색 때문에 악성 기침에 시달리고 루프스가 침투하도록 무장해제가 된 것이 아닐까. 모든 사물의 심연이자 원초적인 불안의 근본이며,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원인이 되지 않은 회색의 그 절대적인 모호함에 근접한 사람은 거친 실타래처럼 뒤죽박죽된, 그러나 놀랍도록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아무것도 없음에 압도당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숲 전체를 흔드는 검은 구름처럼 의도치 않게 일어날 것이고 사라지겠지만.


사실 몇 년 전에 생활공간을 바꾼 적이 있는데, 처음 며칠간 병은 조용하다가도 몸의 어느 곳에 균열을 내고 돌출한다. 추상적이지만 화염과 암묵의 상태로 이끌려나온 것이다. 다른 장소로 공간을 옮겨도 마찬가지다. 약을 바꾸면서 (낯선 약의 효과로) 안심했다가, 몇 번의 끼니가 지나면서 원래대로 돌아오는, 이 지긋지긋한 패턴을 반복하면서, ‘나의 방’은 처음 있던 그 자리로 되돌아온다. 작년에 거의 한 달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알코올로 덧칠된 입원실이 무척 낯설었던 모양인지 회색은 일주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재작년에 입원했을 때도 그랬다. 그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회색의 근친은 놀랍도록 친근하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만일 나의 방이 내가 머무는 자리라면, 회색은 전미래시제처럼 내 감각의 일부가 아닐까. 끔찍하지만 그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방이란 원래 착시(錯視)로 어질러진 침대 위를 고요히 정리하는 어머니의 손에서부터 모성에서 가장 먼 괴기스러움 혹은 권태와 게으름 같은 정신의 후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회색은 나를 자신의 방으로 만듦으로써 은밀하게 계속 살아간다.


나는 자주 나의 방에서 그런 회색과 마주친다. 적당한 단어와 조사, 문장과 문장을 이어붙이다가, 문장의 미로 속에서 어긋났을 때 어느 틈에 회색은 시작되는 것이다. 회색은 방의 사물 뒤에 숨어 나를 엿보고 내가 꿈과 결빙의 미세한 결계에 진입하기만을 기다린다. 이 결계에서 회색은 수련처럼 궤도이고 운동으로써의 물질이다. 나는 회색의 냄새와 형태, 무게와 온도 등 미묘한 효과에 이끌리는데, 책이나 CD, 기타나 필기도구와 같은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어떠한 매개 없이 궤도에 진입하도록 하며, 고유한 운동을 시작한다. 회색은 나를 다른 무엇인가로 바꿔놓기 위해 나를 반죽하는 것이다. 이 상태를 정의하자. 정확히, ‘가위눌림’이다.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찾아온 가위눌림은 신기하리만치 영하의 공기처럼 방의 흐름을 얼어붙게 만든다. 낡은 책들 사이에서 천천히 먼지가 일어나고 서로 부딪히다가 손톱만한 덩어리로 뭉쳐지고는 흩어진다. 대부분은 방의 자그마한 내륙을 떠도는 것인데, 그중 일부는 다시 책이나 사물 속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갉아먹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악몽인가 싶었다. 먼지로 형상된 꿈의 뿌리들이 인격을 가지고 고유한 울림으로서 되살아나는. 하지만 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오자 회색은 이 ‘저주’를 적당한 ‘가여움’으로 혹은 사소한 ‘주의 없음’으로 되돌려버린다.


*


지금 나는 아프다. 아프기 때문에 더 글에 집착하고 더 많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아프기 전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꾸준히, 착실하게 술을 마셨는데, 이 습관이 ‘문자-채집’으로 옮겨 왔다. 나의 방은, 이런 나의 어리석음과 쓸쓸함, 조울증, 심지어는 취기가 오른 편집된 감정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것은 기척을 가진 물리적인 무엇으로) 가까운 곳에서 회색이, 그 잿빛의 모호한 그림자를 펼치고 내가 산만해지길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 방에서, 나의 일과를 시작하고 끝맺는다. 당연히 취미 활동도 여기서 한다. 아프기 때문에 일상의 반경은 넓지 않다. 동선은 아주 단순해 집과 직장, 직장과 식당, 병원과 약국 외에는 거의 없다. 가야할 곳과 가지 않아도 될 곳은 금세 구별되고 나는 이런 식으로 나의 일상을 깔끔하게 분절한다.


맨 처음 수련을 목격한 화가처럼 그 비밀스러운 ‘피어남’(생활)은 온전히 내 몫이다. 혼자서, 스스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므로 나의 생활은 다른 사람과 공유되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린 철학자처럼 그러므로 나의 방은, 내가 스스로 결정한 자폐(自閉)로서의, 내가 있는 모든 장소다. 나의 방이란 내가 있어왔던,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할 모든 기억이다. 나는 그 ‘방’에서 나에게 없던 것들을 배치하고 경계를 만든다. 내게 속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나의 방’에서 난파되며 온전한 내 것으로 소유되기 위해 탈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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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방에 세워진 가구들의 단순함이 좋다. 거기에도 회색은 깃들어 있을 것이고, 나는 부지불식간에 회색에 닿았을 것이다(만일 회색이 날카로운 끌이나 칼이라면……). 나의 방은 원이나 사선은 허락하지 않는다. 직사각형의 단조로움이 마치 제멋대로 꽃이 피는 봄날의 들판처럼 새롭고 환하다. 물론 그 직사각형에는 움푹 들어간, 또 다른 방이 있고, 그 방에는 몇 권의 책이 들어가 있다. 그 책은 누런 서류봉투를 덧씌워 표지를 댔고, 그 위에 흰 색 스티커를 붙여 제목을 적었다. 책등에도 스티커를 붙여 세로로 제목을 적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없다면 책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은 직사각형으로 완성되는 문자들의 가장 놀라운 방이다.


이쯤에서 나는, 나의 방에 회색 말고도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 장소는 생각이 물질적 실체로써 몸을 가지며 살아 움직이는 특이한 곳이다. 이형이나 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치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들>처럼 걸어 다니는 문자들이 종종 목격되는, 염증이 피부에 붙어 흉터를 만드는, 그리고 시간에 따라 피부로부터 반등하거나 미약해지는 나의 방은 ‘생각’을 스스로 증식하거나 삭제하도록 하며 생(生)의 권리를 부여한다.


나는 글을 쓰는 모든 작업을 여기서 한다. 정확히 말해 글과 함께 숨 쉬며 그것을 조각하는 작업을 한다. 글 쓰는 도구가 갖춰진 유일한 곳이기도 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도대체가 문자들은 미생(未生)이다. 이로써 나의 방은 일어선다. 나와 함께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으며 혹은 공복 상태로 알록달록한 약을 삼킨다. 사람들 속에 섞여 지하철을 타고 승강장을 밀려다닌다. 계단을 오르다가 멈춰 숨을 고를 때는 공원 한 구석의 청동 부조처럼 급격히 단절되지만 매일 그런 것은 아니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점심을 먹고, 다시 서류에 파묻힐 때도 나는, 나의 방에서 회색과 함께 나의 일상을 일으켜 세운다. (*)







계간 한국시인 2022년 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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