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의 시간

by 박성현






녹의 시간


박성현




굶주린 짐승들이 지나갔다 작은 발자국들은 깊고 빠르며 진하게 흩어졌다


유리조각이 박힌 담장은 석회가 흐르는 도랑으로 물끄러미 기운다


담장을 넘어온 바람의 사금파리가 지도에 흩어진다 바람은 가장 오래된 지구의 울음,


등고선을 지우면 그곳이 우체국이다 젖은 재의 몽롱한 냄새* 속에서


검정 숄을 두른 여자가 쪼그려 앉아 있다 녹이 낀 대문이 열리자 황급히 사라졌다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以後, 시작노트] 2009년에 등단한 시인으로서는 첫시집이 상당히 늦은 편이다. 통상 빠르면 3년, 보통은 4~5년 사이에 시집을 내는데, 나는 (아무리 출판사 사정이라지만)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와 등단연도가 엇비슷한 시인들은 벌써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하고 있었다. 어찌어찌하여 시집이 나왔는데, 손에 쥘 때까지의 그 마음 고생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누군가 시인이 된 후에 가장 행복했던 적이 언제냐고 물은 적이 있다. 솔직히 한 번도 없다. 믿거나 말거나 시인들을 함부로 욕하면서 습작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나는 아직까지 등단작을 시집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첫시집을 엮으면서 등단작을 배치할 것인지 마감일까지 고민했으나 결국 빼기로 했다. 두 번째 시집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집중했던 표현-체들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 언어는 암중이었고 문장은 상자의 바닥처럼 눌려 있었다. 첫시집을 생각하면 머릿속으로 굶주린 짐승들이 지나간듯 했다. 겨우 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 공터에 서면, 깊고 빠르고 진한 발자국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짐승들은 유리조각이 촘촘히 박혀 있는 담장이 불편했는지 축축한 공터만 헤집었던 것이었다. 내 집에는 바람만이 어떤 조건도 질문도 없이 드나들었다. 지구의 먼 울음이, 그 사금파리 위로 솟았다가 내려앉았다. 검은 숄을 두른 여자가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누었다. 젖은 재의 몽롱한 냄새가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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