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의 외출

by 박성현






여배우의 외출


박성현




식탁에 늙지 않는 것들이 차려져 있다 오직 닉스*만이 그 맛의 비밀을 안다


혀끝에서 말벌이 꿈틀거리면 프로작**이 일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죽은 자는 사진 속에서만 표정을 짓는다 사랑을 고백하는 늙은이는 여전히 히아신스를 들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아무런 희망 없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쁘게 말하려고 한때 춘자를 연기했던 여배우는 현기증을 집중시킨다


촬영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경비행기가 추락한다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난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밤의 여신

** 항 우울제의 일종

***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중에서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수록








[以後, 시작노트] 원래 이 시의 제목은 '라미란 혹은 여배우'였다. 그녀가 아직 무명일 때 본 영화 한편이 인상 깊어 초안을 잡았는데 시를 완성하고 시집에 수록할 무렵이 되자 자신의 이름에 확고한 색채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원래 제목으로 시집을 발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지만 부질 없다. 이 시의 얼개는 단순하다. 노년으로 접어든 여배우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식탁에는 붉고 싱싱한 과일과 따뜻한 홍차가 있고, 그 너머에는 눈가의 주름처럼 소진되기만을 기다리는 우울증 약병이 눕혀 있다. 그녀는 시나리오를 덮는다. 그리고 아무런 희망 없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고쳐 먹는다. 하지만 히아신스를 들고서 여배우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사람은 이미 오래전이 사라졌다. 사진이 없다면 그가 누군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다시 시나리오를 읽지만 끝내 울어버리고 만다. 혀끝에서 말벌이 꿈틀대는 것 같은 느낌이 또 찾아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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