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빗물이 흘러내리는 우산과 알렙이 앉았던 의자

by 박성현






아직도 빗물이 흘러내리는 우산과
알렙이 앉았던 의자


박성현




손등에 물방울이 떨어진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면 긴 의자가 있다 밤과 낮이 마주앉아 사라진 ‘밤’과 ‘낮’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는 그것을 죽은 자들의 허기라 부른다


*


30년 동안 바다를 찾아다니며 시간과 장소가 사라진 ‘바다’를 찍었던 히로시 스기모토*는 조용히 소파에 박혀 늙어가는 남자를 쳐다본다:


지금부터 당신 이름은 알렙**이야

다른 이름은 필요없어


*


호두처럼 딱딱한 코를 중심으로 위쪽에는 무거운 근시가, 아래쪽에는 느린 웃음이 붙어 있다 그는 진통제가 든 박스를 집요하게 만지면서 벽시계를 본다


사라진 낮은 밤의 공백이다


*


두 시에 멈춘 의자는 여전히 정류장에 있다 그리고 빗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한없이 주황에 가까워진다


*


초인종을 눌렀을 때, 그는 무대를 약진하는 무용수와 악수를 나누거나 사과를 씹으며 맥주를 마시거나 망가진 우산을 애써 접는 시늉을 한다 알렙이 앉았던 의자에 아직도 빗물이 흘러내린다, 고 나는 다시 말한다






* 일본의 사진작가

** 보르헤스 단편소설 「알렙」 참고. 알렙은 우주 만물과 모든 시간을 축소하지 않고 3cm에 담은 구슬이다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以後, 시작노트] 죽은 자들도 허기를 느낄까. 그들도 밤새 패스트푸드점 구석에 앉아 있을까. 락스 냄새가 나는 매장에서 식은 햄버그를 먹다가 벽에 걸린 뉴욕의 흑백 사진들을 물끄러미 바라볼까. 카운터에 앉은 청년의, 기름과 때가 덕지덕지 붙은 졸음에 침입해 그/그녀와 함께 뒤척일 수 있을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 자세를 보며 죽은 자들은 미지근한 물이 담긴 욕조에 누워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겁 많은 초식동물이 그러한 것처럼 그들은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위를 살폈다. 창문 밖에는 혼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지나갔고 집 없는 개 몇 마리가 냄새를 맡고 있었다. 죽은 자들은 허기를 채우지 못했다. 살아 있을 때처럼 습관적으로 씹는 시늉을 할 뿐이다. 그들 중 몇 명은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고, 몇 명은 조간을 뒤적였다. 머리를 탁자에 눕히고 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때 히로시 스기모토는 조용히 소파에 박혀 늙어가는 남자를 발견하고서 셔터를 눌렀다. 매장의 무거운 공기가 아주 조금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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