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박성현
배달된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다 내 눈과 코를 살피고 아침마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빼준다 아프지 않니? 퇴근할 때도 애인과 섹스를 할 때도 배달된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조용히 말을 건다 아프지
않니?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내 몸의 은밀한 부피와 무게를 알려주거나 혹은 재미 삼아 이국의 농담을 들려준다 어제 그는 나와 같은 외투를 입고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었다 늘 우리는 같은
문을 열고 시청에서 자하문터널까지 걷는다 나는 그의 어깨에 떨어진 비듬을 툭, 툭 털어내면서 활짝 웃었는데, 강릉에 갔을 때가 기억난다고 말했다 나와 그는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같은 사람을 사랑한다 입술과 젖꼭지까지 그는 나의 골목을 걷는다 아프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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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온몸에 멍이 들었지만 그는 뚝섬에서 모래톱을 걷는 그림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의 찢어진 모서리를 꿰매면서 처음으로 슬픈 표정을 짓는다 밤새도록 식물은 냄새를 감추고 있다 아주 천천히 지느러미를 흔들면서
낮과 밤이 지나갈 때마다 유령처럼 망각이 앉아 있다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以後, 시작노트] 나는 배달된 사람이다. 일정한 부피가 있고 상황에 맞도록 언어를 구사하고, 그 문장의 표피에 덧띄워진 표정이 있으므로 당신들은 나를 '사람'으로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몰염치한 기대일 뿐. 왜냐하면, 나는 늘 배달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어디서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며 벤치에 앉아 있을 것인지 결정하는 명령권자는 늘 당신들이다. 내가 처음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안전하게 여기로 왔을 때, 당신들은 조용히 말했지. "나와 너는 같은 감정을 공유해." 같은 외투를 입고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4월에는 강릉에 갔고 나는 그 바다의 섬뜩한 색깔을 기억한다. 당신들은 나에게 질문한다. "아프지 않니?" 도대체 나는 어디가 아파야 하는 것일까. 뚝섬에서 모래톱을 걷는 그림자들을 바라보았다. 식물들은 냄새를 지우고, 아주 천천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배달된 사람이다. 당신들은 거울을 보며 '나'를 상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