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파국과 희망을 향한 진혼곡(2)

평론

by 박성현





디스토피아, 파국과 희망을 향한 진혼곡(2)


박 성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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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는 명확히 한정된 실체가 없다. 그것은 ‘징후’와 ‘경향’으로 존재하며 역사와 사회마다 다른 표정과 얼굴로 드러난다.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의 개념적 대립 쌍으로 본다면, ‘있음’과 ‘없음’이라는 양립 불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응하는 실체는 없지만 일정한 지향성의 기억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디에도 없지만, 그러한 이유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 그것은 가능성의 영역도, 또한 불가능성의 영역도 지칭하지 않는다. 손에 닿는 실체가 없으므로, 마치 수학과 같이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는 이미지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스토피아는 여전히 유토피아와 ‘유사하게’ 사유되고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유토피아는 없다. 지상에서 결코 실현된 적 없기 때문에, 또한 오직 이상향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의 낯선 곳이자 ‘제로-지대’다. 공간적 깊이나 시간적 거리감도 없으며, 언어-속-에서 언어가 사유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뿐이다.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지만, 동시에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에덴은 도래한 적이 없고, 또한 도래할 수도 없으므로 우리는 더욱 더 간절히 유토피아를 기억하는 것.


디스토피아도 마찬가지. 알랭 바디우가 “주의하라! <맥베스>의 검은 마녀들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은 같은 세계에 속한다”는 문장을 통해 서양의 검은색과 동양의 흰색이 모두 죽음-이미지로 향하고 있음을 환기한 것과 같다.7) 물론 그 방향과 지향은 바디우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디스토피아를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역사에 기록되었거나 누군가가 실제로 체험해서가 아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기억이 ‘닿을 수 없는 욕망’으로 현실화되어 우리의 살과 뼈를 찢고 피가 흥건한 내륙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족에 머물려고 한다면, 디스토피아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그 ‘문’을 흔들어 깨운다. 유토피아의 신비로운 질서가 우리를 무기력으로 안내할 때, 디스토피아는 냉정한 현실감으로 엄청난 무질서와 혼란,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산출하면서 우리를 낙원 바깥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에 대립하는 디스토피아의 유일한 긍정성이다. 횔덜린이 노래했듯, “위험이 있는 곳에는 그러나 /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8)는 것이다.


유토피아에서 한 발 벗어나면 디스토피아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반대로 디스토피아를 뒤집으면 멀지 않은 곳에 유토피아가 물러나 있다. 양자는 모두 서로를 매개로 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바,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이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디스토피아는 어느 장소인가. 그리고 기억의 방법은 또 무엇인가.”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는 어떻게 경험되고 기억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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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명확하다. 디스토피아는 존재가 존재로서의 자기 시간을 멈추고 비-존재로서, 혹은 아주 낯설고 모호하며 불투명하게 나타날 때 시작된다.9) 요컨대, 디스토피아는 존재론적 단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향한 기억에서 낙원-이미지의 거대한 저장고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기억’이란 공통 감각이며, 세대에 걸쳐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 통각들을 유전자에 새겨놓는 일이다. 디스토피아는 역사적 상황들이 당대 현실로 다시 재구성된다. 당대의 약한 고리들이 끊어진 곳, 혹은 집이나 가족처럼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돌변하는 곳이 바로 디스토피아인 것이다. “우리는 신이나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일반화된 교환과 일반적인 욕구 충족의 기술적 장치에 의해 언제나 받아들이는 냉혹한 상황 속에 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며,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의 목숨은 살아남았지만 갚을 수 없는 빚에 얽매여 있는 노예들의 상황 속에 있다. 이 모든 것은 교환과 경제 질서 속에서 오랫동안 작동할 수 있다”10)는 장 보드리야르의 폭력과 테러에 대한 진단은 디스토피아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특히나 정치경제에 대한 입론은, 디스토피아의 징후와 경향을 가늠하는데 유용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현대자본주의의 주도적 이념은 ‘신자유주의’로 압축된다. 신자유주의는 국가 개입의 최소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경제성과의 최적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은, 역설적으로 민중들이 국가와 싸워 쟁취한 인간의 보편적 이념과 복지의 최소화라는 악몽을 쏟아냈다. 국가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지켜보기만 한다. 이 방임은 많은 국가에서 의료나 전기, 철도 등 국가 기간산업의 민영화를 초래했고, 죽음의 불가능한 교환마저 가능하게 만들었다. 국가 기간산업조차 민영화되었고, 노조는 약화되었으며 브레이크 없는 신자유주 체제의 양적 팽창을 더 가속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쓰레기 더미 옆에서 죽었다. 결국 남는 것은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무한 증식뿐이다.


신자유주의에서 ‘타자’는 계산된다. 양적으로 전환 가능한 에너지 단위로써 말이다. 과학과 기술은 회의(懷疑)한다. 회의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신뢰와 친교를 끊어버린다. 세계는 측정할 수 있으며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 세계는 익명의 물화체계다. 세계 전체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원으로 간주될 때, 잔인하게도 디스토피아가 끼어든다. 왜냐하면, 인간도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모든 증여가 멈춘 곳, ‘백색실명’의 암흑이 디스토피아다.


하이데거는 <기술과 전향>에서 이러한 모든 사태를 초래한 디스토피아의 현대적 근본 원인을 이렇게 쓰고 있다.


기술적 의지는 이제 더 이상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자립적인 사물들과 마주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철시켜 나가는 지배에 맞추어 획일화되어 만들어진 자신의 재료와 마주 서 있는 것이다. 사물들이 이런 식으로 인간의 기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능에로 소멸되어 가고 있는 데 기술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기술적 인간은 계란, 우유, 고기를 선사하는 가축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계란, 우유, 고기공급원—이것들은 그 이상은 무(無)나 다름없다—을 마주하고 있다. 그는 편리한 전기를 일으켜 인간의 노동을 가볍게 해주는 강이 아니라 수압 제공원을 마주하고 있다. 석탄과 광석을 보장해 주는 대지가 아니라 석탄 또는 광석 저장고를 마주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똑같은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즉 사물들이 순전히 기술적인 요구의 관련점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제 그러한 관련 안에 들어설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며, 아니 그런 것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여기에 주체가 그리고 저기에 대상이 아니라, 욕구와 욕구 충족이라는 두 극 사이의 연관만이 있을 뿐이다.11)


요약하면, 현대사회에서 디스토피아는 기술과 과학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스스로가 목적이 될 때, 그리고 그것이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모든 존재자들을 재편할 때 시작한다. 디스토피아는 존재의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한다.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인간과 함께 수천 년을 동거 동락한 가족으로서의 ‘가축’은 단지 인간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공급원’으로 전락한다. 세계의 모든 것은 기술이 요구하는 ‘관련점’으로 사라져버린다. 일종의 주문 청탁서와 같은 거대한 자연-창고만 있을 뿐이다. 인간들의 관계도 마찬가지. 세계를 움켜쥔 손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인간의 본래성이란 영화 <메트릭스>의 지옥과 같은 것이다. 과연 디스토피아에서 세계-내-의 ‘존재’는 자신의 근본 형식을 유지하며 존재할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는 인간과 세계, 세계와 세계, 인간과 인간의 신뢰와 친교가 깨진 상황의 낯선 순간에 대한 이미지다. 디스토피아는 기술과 과학의 힘으로 ‘지옥의 문’으로 향하고 끝내는 그 문을 열어버렸다. 수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이 우려한 것은 디스토피아의 이러한 편재성이 이미 우리 생활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신자유주의의 무분별한 자기 복제와 무한 팽창의 욕망,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한층 더 심각해진 물신화 양상들이 ‘디스토피아’에 각인되어 있다. 둘째, 과학과 기술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과 이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성역화한 ‘기술관료주의’(technocracy), 셋째, 도구로 전락한 인간 주체의 참을 수 없는 소외와 결핍, 권태는 물론 국가 간의 전쟁이나 내전, 테러, 종교적 억압과 살상, 위안부 할머님이나 난민의 존재,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 창궐, 무지막지한 가뭄과 기근, 태풍과 쓰나미, 미세 플라스틱과 쓰레기 섬에 의한 바다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에 따른 극지 생물의 몰락, 우주 쓰레기, 체르노빌과 후쿠오카 원전 사고, 대량 살상무기, 남성권력구조, 성소수자와 인종 차별, 디아스포라나 호모 사케르로 대변되는 인간 내의 철저한 비인간적 시선에도 디스토피아는 작동한다. 이 모든 것은 ‘타자의 상실’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직결되면서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고리라는 것이며, 따라서 디스토피아에 내재된 경험적이면서도 적확한 이중 알레고리를 읽어야 한다는 것.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는 장소’로서의 대립-이미지, ‘일상’ 어디에나 스며든 ‘디스토피아’, 유토피아를 전복하려는 검은 사제들의 이념과 의지가 그것이다.


(계속)



(7) 알랭 바디우, 박성훈 옮김, <검은색>, 민음사, 2020. 46쪽.

(8)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기술과 전향>, 서광사, 1993, 77쪽 재인용.

(9) 영화 <겟 아웃>에서 뇌를 이식당한 흑인들의 낯설고 불가해한 모습을 상상해보라.

(10) 장 보드리야르, 배영달 옮김, <지옥의 힘>, 동문선, 2003, 64쪽.

(11) 하이데거, 앞의 책, 184쪽.




계간 실천문학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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