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박 성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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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함께 사회의 구석구석에 스며든 체제의 이념과 방법을 소진하는 형식이며, 당대인들의 ‘기억’을 통해 그때그때마다 다른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디스토피아가 울리는 경종은 시대를 관통하는 직관적 성찰로 이어진다. 디스토피아는 대상의 모든 것을 죽음 혹은 무(無)로 돌려세울 정도로 강렬하지만, 그것에 대항하는 자는 철저한 자기-실존에 대해 물어야 한다. 마치 <모비딕>에서 멜빌이 ‘이슈메일’이라는 목소리─“연극은 끝났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난파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12)─를 남겨두고 에이해브를 비롯한 선원들의 ‘실존’을 증언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디스토피아에 던져진 자들은 자신을 비롯한 세계의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질문함’이란 “위험이 더욱더 가까워 올수록, 구원자에로 이르는 길은 더욱더 밝게 빛나기 시작하고, 우리는 더욱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그 까닭은 물음이 사유의 경건함”13)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흉측한 해충으로 변한 자신을 살펴보며 계속 그 이유와 변명과 후회를 묻거나,14) “내세라는 것, 모든 미래의 세계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인가? 나에게는 당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누구인가? 나 혼자뿐인가? 이게 나 자신인가?”15)라며 느닷없이 찾아온 광기의 귓속에 속삭여야 한다. ‘묻는다’는 것은 철저한 고립 속에서도 그 ‘파국’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의 언어다. 사무엘 베케트의 명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라. 블라디미르는 끝없이 질문하며 자신과 실존의 끈을 잃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에스트라공은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벗겨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잠들어버린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바라본다)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시 얻어맞은 얘기나 할 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사이)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난산을 하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 찼구나.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에스트라공을 바라본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두자고. (사이) 더는 버틸 수가 없구나. (사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16)
블라디미르는 자신과 에스트라공의 처지를 잠깐 되새긴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행동들은, 자신들이 봐도 이해할 수 없다. 반드시 온다고 약속하지만, 결코 올 리 없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서로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을 지껄이는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묻는다.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일까?”라고. 그는 ‘질문함’으로써 모든 사회적 관계망들이 붕괴된 ‘디스토피아’를 전복할 일말의 힘을 얻는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디스토파이의 내면을 핍진하게만 그렸던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파국과 희망을 향한 하나의 진혼곡이다.
‘디스토피아에 던져진 자’는 질문하는 동시에 대답하는 목소리다. 거의 독백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하게 말한다. 발음이 느슨하고 마디가 없어 웅얼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말한다. 누가 듣건 말건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말하고 말하며 또 말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목소리는 자신의 불행과 행복을 정확히 구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곳에 있으려 한다. 이 운명적인 상태는 지난 몇 년 간 더 악화되어 나아지지 않았으며, 나는 점점 더 짧은 간격으로 빈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나탈로 되돌아오고 나탈에서 다른 큰 도시, 즉 베니스와 로마로 갔다가 되돌아오고 프라하로 갔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금방 떠나 온 곳과 덜라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 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 내지 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이다.17)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라 고백하는, 저 내면에 일말의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행복할 때를 정확히 안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그는 행복할 뿐이다. 가는 곳이 어디든 도착하면 불행해진다는 이 불가해한 목소리는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뚜렷한 ‘목적 없음’을 정확히 대변한다. 우리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아침을 먹으며 현관을 나온다. 그리고 대중교통을 타고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한다. 해야 할 일들에 완벽히 적응하기 위해 혹은 ‘나’의 가치를 좀 더 올리기 위해 틈나는 대로 ‘공부’한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퇴근하고, 잠시 ‘저녁이 있는 삶’을 갖거나 가정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 내지 못하고 떠나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본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을 중심으로, 그것의 기능이 한꺼번에 마비되었을 때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작품 서두에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 감염자가 나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도시 전체가 시력을 잃은 사람들로 넘쳐나게 된다. 첫 발병자는 “갑자기 앞이 안 보여요. 하얀 우유 속을 걷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 백색실명은 도시 전체의 시스템을 붕괴시키는데, 더 끔찍한 재앙은 인간성이 급격이 상실되면서 사람들이 짐승보다 못한 야만의 세계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얼마 후 백색실명에 걸린 사람들의 시력이 되돌아오는데,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의사의 아내만 시력을 잃게 된다. 사람들이 그녀의 의연함을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18)
작가의 통찰대로 우리는 어쩌면 애초부터 눈 먼 자들일지 모른다. 그녀의 말처럼 눈을 뜨고 있으나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가 애써 보지 않을 때, 백색실명의 디스토피아는 순식간에 펼쳐진다. 이미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와 유사하게 ‘소통 불가’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그곳의 법은 오로지 약육강식이다. 작가는 “얼마 전에 나는 꿈의 문을 지나 그곳에 들어섰다. 유명한 파괴의 도시가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을”이라는 호손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그 폐허에 곧장 진입한다. 물론 그 세계는 상호 이해의 가능성이 줄어든, ‘소통 불가’의 세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리는 알아듣지만 그것은 우리 정신 속에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 알지 못하는 어느 낯선 언어에 속한 단어로만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낯선 소리의 단어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다 보면 대화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게 당연하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언어로만 말을 하는 셈이 되고, 결국 상호 이해의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의사소통이 어렵게만 되는 것이다.”19)
이들이 겪었던 ‘디스토피아’는 징후적인 동시에 경향성으로써 우리의 삶에 파고든다. 징후와 경향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대칭한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19 사태’와 문학이 통찰한 디스토피아는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작동하는 디스토피아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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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 시대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디스토피아’마저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저 가공할 자본주의 때문이다. ‘디스토피아’의 본래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남은 것은 생활의 장식품이라는 물신이다. 디스토피아는 채널을 돌리면 얼마든지 눈앞에 소환할 수 있는, 경험 가능한 목록이 된 것이다. 더 잔인하고 더 지독한 디스토피아를 원한다면 ‘당신’은 돈만 지불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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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현대화된 원-이미지를 살펴볼 때다. 시각적으로 단순화된, 그리고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는 신의 입술과도 같은.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프리츠 랑 감독의 1927년 장편영화 <메트로폴리스>를 만나게 된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SF영화로서 가치와 의미가 손색없는 이 작품은, 강렬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과학과 기술에 대한 거대한 묵시록을 완성한다.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자본가들의 부와 명예, 그리고 신성과 절대 권력은 지하 세계의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과 확연한 대비를 이끌어내며, 비극적 서사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기술관료주의’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맹렬한 자기 복제를 읽을 수 있으며, 특히 기계-도시의 테크놀로지를 진보와 동일시하는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와 기술과 과학을 맹신하는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징후들까지 찾을 수 있다. 특히, 마리아를 복제한 기계인간이 노동자들을 향해 “기계를 굶겨요. 어리석은 자들이여, 끝장냅시다!”, “기계를 죽이러 가요!”라며, 선동하는 부분에서는 테크노크라시의 놀라운 자기-완성을 보여준다.20) 이처럼 <메트로폴리스>는 진보의 낯선 환상, 불확실성과 공포를 예언하며, 지금까지도 기술 시대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약한 고리를 양분하는 이중 알레고리로 해석된다.
이 영화에서 공간과 소리, 색채의 분할은 무척 중요하다. 빛과 그림자색의 단호한 대비는 날카로운 기계음과 밝고 부드러운 자연음과 맞물리며 수직의 빌딩과 지하의 깊고 어두운 세계를 완벽하게 분할한다.
첫 번째 장소는 메트로폴리스의 지배자 ‘요 프레더젠’(Joh Fredersend)이 거주하는 곳이다. 작품에서는 ‘새로운 바벨탑’이라 일컬어지며 근대 문명의 총 집산지로 등장한다. 현대 건축 미학이 집결된 마천루는 물론이고, 공중을 가르는 도로와 고속철도, 비행기까지 그야말로 <블레이드 러너>(1979)의 원-이미지가 여기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인공낙원으로 묘사된 ‘영원한 정원’까지 함께 있으니 에덴동산의 기적이 실현되었다 해도 과장은 아니다. 선택받은 자는 매일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경기를 하고, 파티를 열며, 고상한 예술과 학문을 곁들인 채 귀족적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깊숙이 내재된 얼굴-표정은 마천루의 공간-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의 행동에는 공백이 많으며, 귀족적 풍모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기 때문이다. ‘권태’의 엄습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이 기괴한 기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특히 프레더젠의 아들 ‘프레더’(Freder, 그는 머리와 손의 ‘중개자’다)가 ‘마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그녀가 ‘형제’라는 단어를 썼을 때 느꼈던 강렬한 ‘끌림’의 정체가 이것이다. 인공의 향기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흙냄새가 마리아에게서 넘치도록 흘렀던 것이다.
이 ‘새로운 바벨탑’은 노동자들의 지하 생활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그들은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즉 구조화된 암흑지점으로서의 ‘파놉티콘’(Panop-ticon)과 연결된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유토피아로 그려지는 빛의 바벨탑도 구조적으로는 어둠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암시는 영화 첫 머리에도 등장한다. “머리와 손의 중재자는 가슴이다”라는 문장은 기술적 진보라는 유토피아가 결코 인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에피그람인 바, 유토피아와 반(反)-유토피아의 이중성은 지하로 향하면서 한층 더 분명해진다.
두 번째 장소는 더럽고 열악한 지하 세계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이다. 똑같은 검정 제복을 입고 이보다 더 강한 ‘복종 이미지’는 없을 정도로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생활한다. 지배계급에 의한 그들의 통제는 일상의 모든 것에 걸쳐 있다. 그들은 하루 10시간 동안 일을 하고 정해진 식사 시간을 준수해야 하며, 기계가 멈추지 않도록 정확한 시간에 교대를 해야 한다. 동일한 작업복에 동일한 보폭에 동일한 표정—어쩌면 그것만이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자유일 것이다. 그들의 증오는 무기력이고, 그들의 분노는 멈춰버린 공장의 적막과 같다. 사정이 그러하니 페니키아 불의 신 ‘몰록’(Moloch)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몽환적 장면에서 그들은 묵묵히 계단을 올라간다.
문제는 지하의 노동자들이 ‘생성’과 ‘파괴’라는 이중 주체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메트로폴리스를 유지하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도구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 ‘기계’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파국의 주체라는 말이다. 노동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테크놀로지의 배반’이라는 역설을 증명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기계-마리아’에 현혹된 노동자들이 기계에게 죽음을 내리려고 질주하는 장면은 그들의 증오와 분노가 무기력과 적막에서 혁명적 에너지로 전환되는 경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노동자의 이러한 이중성은 빛의 테크놀로지의 구조와 유사한 형식으로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메트로폴리스>에서 프리츠 랑 감독은 ‘폭동’(혹은 혁명)이 아니면 새로운 바벨탑의 지상과 지하는 만날 수 없도록 설계한다. 이 설계도의 분할선은 매우 끈질기고 집요하며 강력한데, 각각의 세계가, 각각의 질서와 몫으로써 충분히 안정적이었다. 물론, ‘중개자’의 등장으로 각각의 최적화된 구조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되지만 말이다.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와 겹쳐지고 뒤섞이며 혼돈과 무질서로 빠진다. 두 개의 극에 의해 두 계급의 일상이 찢어지는 것이다.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대칭하며, 파국과 희망을 향한 하나의 진혼곡을 연주한다. (*)
(12) 허먼 멜빌, 김석희 옮김, <모비딕>, 작가정신, 2011, 683쪽.
(13) 하이데거, 앞의 책, 101쪽.
(14)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1998, 9~12쪽.
(15) 앙드레 브르통, 오생근 옮김, <나자>, 민음사, 2008, 149쪽.
(16) 사무엘 베케트, 김문해 옮김, <고도를 기다리며/ 몰로이/ 첫사랑>, 동서문화사, 1999, 114쪽
(17) 토마스 베른하르트, 윤선아 옮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현암사, 1997, 119쪽.
(18) 주제 사라마구, 정영목 옮김, <눈먼 자들의 도시>, 해냄, 1998, 461쪽.
(19) 폴 오스터, 윤희기 옮김, <폐허의 도시>, 열린책들, 2002, 135~136쪽.
(20) 왜냐하면, 노동자의 ‘폭동’은 지배계급의 자위권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계간 실천문학 2020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