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박 성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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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병 이전과 이후를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코로나19’는 실로 맹렬하고 집요한 ‘사신(死神)’이었다. 지구상에 코로나19의 안전지대는 없다고 단언될 정도로, 바이러스의 생존기는 끈질겼다. 중국에서 처음 보고된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아 전 지구 전체를 집어삼켰다. 동양인 병이라고 냉소하던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멈췄고, 이어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가 멈췄다.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피부색이나 그가 어느 지역에 사는지, 또 어떤 민족이며 어느 국가에 속하는지를 전혀 보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숙주로서의 인간을 집어삼킨다. 많은 국가에서는 전시를 방불케 하는 지역 봉쇄령과 각종 금지령을 내려야 했다. 감당할 수 없는 환자들 때문에 의료시스템이 붕괴된 국가도 속출했다. 시신이 거리에 방치되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세대가 경험한 적 없는 지독한 악몽, 21세기의 새로운 ‘디스토피아’(Dystopia)가 눈앞에 창궐했다.
악몽은 전염된다. 악몽이 무서운 이유가 그것이다. 악몽 속에 똬리를 튼 또 다른 악몽들 인간에게 옮아가며 인류를 잠식한다. <페스트>를 통해 까뮈가 말했던 것은, 악몽을 단지 꿈으로 남겨두는 인간의 의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1)
그러나 악몽 속의 또 다른 악몽에 대해서 우리는 자칫 간과할 수 있다. ‘코로나19’를 종식시켰다 해도 우리는 악몽의 심연을 기억하고 있다. 바로 국가 안팎에서 자행된 숱한 ‘차별’과 같은 ‘타자-죽이기’가 그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우리나라에도 모든 언론의 이목을 이상하게 집중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5월 6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생활 방역’으로 전환시킨다는 정부 방침이 나오자마자, 이태원 클럽을 중심으로 다시 집단감염이 시작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특정 종교에서 발발한 대규모 감염사태와는 양상이 달랐고 그동안 생활방역을 꾸준히 실천해 바이러스에 대한 내성과 저항력이 쌓인 상태였지만, 언론의 카메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코로나19’ 사태와는 상관없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지극히 후진적이고 전근대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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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지금 우리가 겪는 디스토피아의 ‘악몽’은 순전히 ‘코로나19’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바이러스에서 악의를 찾을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와 함께, 인간에게 내재한 고질적인 악습과 편견, 병폐 등이 이번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적 취향을 우리 사회가 존중했다면, 이태원 클럽의 집단 감염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졌을 것이다. 얼마든지 다르게 사유하고 대처할 수 있었음에도, 우리나라는 성숙하지 못했다. 멈춘 사회는 다시 움직일 것이고, 의료시스템의 붕괴는 다시 완성을 향해 질주하겠지만, 우리 내부에 도사린 악몽의 디스토피아들은 어느 때고 튀어나와 다시 집단감염을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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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디스토피아는 희망의 부질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만드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상당히 미시적이고 포괄적인 전략이며, 존재를 그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붕괴시키는 잔인함이다. 이에 대한 조지 오웰의 태도는 분명하고 단호하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우연히 목격한 디스토피아의 섬뜩한 풍경을 묘사한다.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해 가는데 슬럼가에 사는 스물다섯 살 정도의 젊은 여자를 보게 된다.
그때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본 것은, 까닭 모르고 당하는 어느 짐승의 무지한 수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모진 추위 속에, 슬럼가 뒤뜰의 미끌미끌한 돌바닥에 꿇어앉아 더러운 배수관을 꼬챙이로 찌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지를, 내가 알듯 그녀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2)
한 젊은 여자가 모진 추위 속에서, 슬럼가 뒤뜰의 돌바닥에 꿇어앉아 있다. 그녀의 손에는 가늘고 긴 꼬챙이가 들려 있는데, 아마 얼어붙어 막힌 더러운 배수관을 뚫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분명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과 체념, 권태와 굴욕은 물론 동시에 앙상한 팔뚝에서 꿈틀거리는 삶에 대한 본능적인 의지도 읽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슬럼가에 내던져진 노동자들의 ‘끔찍한 운명’은 바로 눈앞에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그 자체이며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이 악몽 속에서의 그녀가 꿈꾸는 희망은 진짜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벗어남’이라는 단어조차 기억해낼 수 없을지 모른다.
조지 오웰이 본 젊은 여자의 눈빛에는 일말의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빈약하고 모호했으며 아주 잠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묻어 있는 감정들은 슬럼가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자체가 부질없는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악몽을 벗어날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잔인한 디스토피아는 없다. 이 출구 없는 악몽은 ‘빅 브라더’의 교묘한 통치술로 이어지며 ‘전체주의’로까지 이어진다. 잡혀온 윈스턴에게 오브라이언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그의 ‘미소’는 상대에 대한 비웃음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동시에 얽혀 있다.
“윈스턴, 자네는 견본에 난 흠과 같군. 한마디로 씻어버려야 할 오점이지. 우리는 과거의 처형자들과 다르다고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소극적인 복종이나 비굴한 굴복으로는 만족 못하네. 자네가 우리한테 항복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야만 하네. 이단자들이 우리한테 반항한다고 해서 그들을 처형하는 게 아닐세. 우리는 그들을 전향시켜 속마음을 장악함으로써 새사람으로 만든다네. 그들이 지닌 악과 환상을 불태워 버리고, 외양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영혼까지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지. 그들을 죽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든단 말일세. (중략) 소련에서 숙청당한 희생자들도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머릿속에 반항의식을 갖고 있었네. 그런데 우리는 처치하기 전에 두뇌를 완전히 개조시키지. 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우리가 여기에 끌고 온 사람치고 우리에게 끝가지 맞선 자는 없었네. 모두 완전히 세뇌되었지.”3)
<1984>의 오세아니아는 기술과학이 정점에 달한 국가다. 대신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며 결집할 자유는 박탈당했다. 관료들은 끊임없이 사회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견본에 난 흠’으로 치부한다. 통제의 완성은 ‘소극적인 복종’이나 ‘비굴한 굴복’이 아니며, ‘자유의지’에 의한 <자발적 복종>이다. 반체제 의식을 가진 자들의 ‘악’과 ‘환상’을 스스로 지우도록 하고, 겉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장악하기 위해 전체주의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카드를 꺼내드는데, 오브라이언이 넌지시 밝힌 빅 브라더의 ‘무서움’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의식개조에 있다. 윈스턴은 결국 저항과 의지가 완전히 거세된 ‘새사람’으로 바뀌며, 당의 언어에 무조건 복종한다. 이 디스토피아의 비극이 완성되는 것은 윈스턴이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을 때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 안을 떠나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지내온 유랑(流浪)의 삶이여! 진 냄새가 배어 있는 두 줄기 눈물이 그의 코 양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잘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4)
그가 스스로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 순간, 디스토피아의 악몽은 완성되고 만다. 짐승을 향한 치밀한 ‘덫’이 결국 그 짐승을 박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신에게 ‘고해성사’하듯, 진 냄새가 배어 있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앤서니 버지스의 1962년 작 <시계태엽 오렌지>도 기억해야 한다. 가까운 미래 사회에서, 폭력의 편재성과 인간 교정의 상관관계를 노골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도 디스토피아의 악몽을 갖고 있다. 주인공 알렉스는 감옥에서 루도비코 프로그램을 수용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당국은 이렇게 고백한다. “문제는 그 요법이 과연 진짜로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 선함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란다, 6655321번아. 선함이란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어떤 것이야. 선택할 수 없을 때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없는 거야.”5)
한 가지 첨언하자. 당에 대한 철저한 복종, 개인의 종속된 의지라는 ‘디스토피아’는 소위 ‘빅 브라더’의 이념이나 루도비코 프로그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강조한 바 있는, 언어와 사유, 세계의 불일치 속에도 존재한다. 언어와 사유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닿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악의 평범성은 발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빅 브라더의 간교한 술책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한다. 앞서 언급한 ‘이태원 클럽의 집단감염’이 사태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공격으로 이어졌음에도 일상생활에서 이를 공론화하고 토론과 성찰하는 기회는 자주 없었다. 디스토피아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빅 브라더’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 발표한 <멋진 신세계>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6)
(계속)
(1) 알베르트 까뮈, 김화영 옮김, <페스트>, 민음사, 2011, 329쪽
(2) 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한겨레출판, 2020, 28쪽
(3) 조지 오웰, 정희성 옮김, <1984>, 민음사, 2003. 355~356쪽.
(4) 조지 오웰, 같은 책, 417쪽.
(5) 앤서니 버지스, 박시영 옮김, <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2005, 100쪽.
(6) 올더스 헉슬리, 안정효 옮김, <멋진 신세계>, 소담출판사, 2015. 333~334쪽.
계간 실천문학 2020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