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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내린 May 05. 2020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할까요?

한국의 취준생이 바칼로레아 철학에 답하다 (14)

무대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요. 아니, 그것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죠. 연극 속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요. 오로지 현재뿐이죠. 그곳에서 흐르는 건 시간이 아닌 모든 것들, 가령 온갖 종류의 감정들, 관계들, 존재들이에요.
<선한 이웃> 중


철학에선 가치를 '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중요성'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관계'에 주목하면 시간의 길고 짧음이 가치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10년 지기 친구 사이도 틀어질 때도 있고, 한 번의 만남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는 때가 있는 것처럼 영원한 것 혹은 오래가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대상이 존재하는 시간의 길고 짧음(양)보다 그 대상에 부여하는 의미(질)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이라도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저의 경우 '변화'를 그 기준으로 의미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합니다. 스쳐가는 만남과 인연, 혹은 찰나의 순간일 뿐이더라도 생각의 저변을 넓힐 수 있다면 그것을 현재 소유하지 않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하천을 따라 걷는 중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한순간 보였다 사라졌지만 그것은 물고기란 걸 알아차렸습니다. 물고기는 물 밖에서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해선 수면 위로 나오지 않습니다. 하천의 깊이는 얕은 편이었지만 몸뚱이가 물 밖에 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선 수면이 바닥과 맞닿아 있는 곳을 넘어서야 합니다. 제가 보았던 것은 물고기가 그곳을 넘어가기 위해 수면 밖으로 나와 온 몸을 파드득대던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겐 유심히 보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만한 것에 불과했지만 저에겐 가치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물고기 또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점에서 저와 비슷하다는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물건을 갖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이사를 여러 번 하면서 짐을 줄이기 위해 물건을 내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그때마다 문뜩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화재가 나서 빨리 대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무엇을 가지고 갈까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은 자신이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아는데 도움이 됩니다. 물건을 버리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더라도 모든 게 불태워진 상황을 상상하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 아니구나 하고 깨닫곤 합니다. 물건에 담긴 추억이 아깝긴 하지만 내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대상과 함께 있는 시간이 순간에 불과하더라도 의미가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지 출처: Photo by Elena Koychev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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