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가까이하면 보는 것이 달라진다
아마도 대학교 4학년 막 학기였을 때였을 것이다. 서울에 열리는 전시회를 다녀온 친구는 내게 두 장의 엽서를 줬다. 그 전시회는 근대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전이었다. 그때 받은 엽서가 나를 예술의 세계로 이끌어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학교의 구 본관이자 인문대학 건물이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 김중업이 설립한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고서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맞은 첫 휴일 르 코르뷔지에 전시회를 다녀왔다. 친구가 묘사한 전시회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멋지고 환상적일 거라 기대했던 나는 상상한 것과 다른 모습에 실망했다. 일련의 사진과 스케치들을 보면서도 감흥이 없었다. 그 대신 르 코르뷔지에의 철학에 대해선 인상 깊었다. 당시 내가 쓴 감상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길로 걸으면서 가진 신념이 가장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콘크리트로 된 현대의 아파트 양식을 만든 르 코르뷔지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저렴한 비용으로 빠르게 만들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물을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아파트가 탄생하였고, 이는 생명에 대한 존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반영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에 관해 무지했음에도 나는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전시회를 가게 됐다. 알 수 없는 사진과 그림을 꾸역꾸역 보면서도 오디오 가이드와 전시 해설을 보며 작품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려고 했다. 3년 간 전시회를 다니면서 나는 점차 예술에 대해 이해하게 됐음을 깨달았다. 예술의 역사와 예술가의 생애를 알고 나니 스스로 작품을 해석하고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술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 결정적인 사건은 <안 봐도 사는데 지장 없는 전시>에 다녀온 날에 일어났다. 하루 24시간 동안 일상 속 예술 현상을 탐구하는 이 전시회에서 빛을 소재로 한 작품을 발견했다. 숨이 멎을 정도로 빛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작품은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전시회를 다녀온 후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지나쳤던 평범한 것들이 특별해지고, 선명한 색채로 다가왔다. 나는 특히 빛과 그림자, 규칙성 그리고 구도에 따라 달라지는 사물의 모습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사진으로 남겨놓아 수집하고 있다.
빛과 그림자
규칙성
구도
오늘 나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우아한 관찰주의자>라는 책을 발견했다. 책 뒤편에 소개말에는 '셜록홈즈'와 'FBI'가 훔치고 싶었던 관찰의 기술에 관한 책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릴 적 셜록홈즈처럼 탐정이 되는 상상을 하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그 책을 집어 들어 계산대로 향하면서 문득 지금 하고 있는 UX공부와 관찰력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포착해내는 관찰력은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날 것에 불과한 관찰력을 조금 더 다듬으면 더 빨리 그리고 더 자세히 핵심을 낚아챌 감각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