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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내린 May 27. 2020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죽음에 대한 단상들

#단상 1 죽음이 가깝게 느껴지던 날

죽음에 대한 최초의 공포

어릴 적에 심한 감기를 앓았던 기억이 있다. 동생과 내가 나란히 누워있었고 펄펄 끊는 열에 가래섞인 기침을 했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구해오신 큰 스크린에 프로젝터로 영화를 띄우고 가족들이 영화를 보던 참이었다. 나는 몽롱한 와중에 목이 말라 부엌으로 갔다. 미처 가래를 뱉지 못한 채 성급히 물을 마시자마자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 숨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어떻게든 게워내려 했다. 콜록콜록. 겨우 숨을 내뱉고 나자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나는 고독한 싸움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힘 없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혼자다.


반 친구의 교통사고

중학생 시절 반 친구 A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A의 친구는 전날 밤 같이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목격했다고 전하며, 그때 상황을 얘기해줬다. 차에 부딪히는 순간 허공에 떠오르는 몸, 멀리 떨어진 곳에 튕겨져 버린 A의 모습. 단편적인 장면들 속에 그의 공포어린 감정이 전해졌다. 다행이 A는 수술 이후 무사히 회복해 남은 학기를 다녔다. 죽음은 나이에 상관없이 찾아온다.


할머니의 죽음

대학시절 1학기가 지나고 2학기가 오기 전 그 사이에 동생과 나는 할머니댁에 잠시 머물었다. 보수적이고 옛 것을 중시했던 할머니와 달리 진취적이고 새로운 것을 중시한 나와 정반대라 같이 사는 중에 부딪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 사건으로 인해 할머니를 미워하게 됐는데, 나중에 돌아가시고 나서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그 감정이 한낱 헛된 감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떠나보내는 입장에서 밉고 말고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죽음은 죽은 자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단상 2 죽음을 가까이 하는 법

죽음 너머를 상상해본다

죽음에 대한 최초의 공포를 겪은 이후 나는 죽음 너머를 상상했다. 죽은 뒤에는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될까. 먼저 팔다리의 감각이 없어질 것이다. 신체가 없는 나를 상상하기는 쉬웠다. 의식이란 것은 남아있으니까. 나는 그 의식이 우주에 놓여있는 상상을 했다. 의식조차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잠깐 사이였지만 아무런 생각도 인지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생각할수록 섬뜩해 도로 상상을 지워버렸다. 무로 돌아가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남은 생일을 세어본다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죽음을 의식하며 살기란 어렵다. 언젠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지만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좋은 방법이 남은 생일날을 세어보는 것이었다. 내가 80살까지 살 수 있다고 가정하자. 지금 나이는 27살, 80에서 27을 빼면 53이다. 올해 생일이 지났으니 1을 더하지 않아도 된다. 즉 나는 이제 남은 생일이 53번 남은 것이다. 1년이 지날 때마다 카운트다운이 된다고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나는 53번 생일동안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하며 보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오늘/내일 죽는다면 가정을 해본다

죽음은 때론 삶의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한 유용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제약,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미적될 때 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에게 묻곤 한다. 만일 오늘 죽는다면 나는 지금까지의 삶이 만족스러운가? 나는 이 질문에 지금까지 '예'를 선택한 적이 없다. 이제 막 뭘 하려는 참인데 죽는다고? 어차피 내일 죽는 인생인데 하고 싶으면 해. 죽음이 진정 다가오고야 후회하지 않기 위함이다. 


#단상 3 죽음계획서 쓰기(feat.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나는 죽은 이후에 어떤 장례를 치루고 싶은지 정도만 생각해두고 있었다. 최근에 서점에서 우연히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집지 않았더라면 죽음계획서란 단어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책 부록에는 임종 직전 그리고 이후의 절차를 계획해볼 수 있는 질문들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중 임종소망에 대해 답해보려고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장소에서 죽고 싶다

나는 마지막 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는다. 햇볕이 드는 창가 근처에서 침대에 누워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 싶다.


내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란다

나의 가족,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서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찾아왔으면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종교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란다

나는 무교다. 종교 의식을 지내지 않으려 한다.


바라건대, 다음과 같은 사람은 보고 싶지 않다

나는 소박하게 치러지길 바란다.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사람들, 진정으로 슬퍼해주는 사람들이 찾아와줬으면 한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형태의 지원과 위로를 받고 싶다

<안녕, 헤이즐>이란 영화에서 죽음을 앞둔 어거스터스에게 헤이즐이 미리 추도사를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죽은 후에 장례식장에서 추모하는 대신 죽기 전 그동안의 삶 그리고 주변인들이 내게 말해주고 싶은 것들을 듣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대화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진통제를 맞아야 한다면,

나는 약에 취하게 되더라도 통증이 완전히 통제되길 바란다.

예/아니요 > ...

나는 통증을 어느 정도 견디며 깨어 있기를 바란다.

예/아니요 > 예

고통의 강도가 얼만큼인지 알 수 없다. 어려운 문제다. 진통제를 맞으며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또렷한 정신에 고통스러워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을까. 적어도 내가 감수할 만한 고통이라면 깨어 있기를 바란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나 예배가 치러지길 바란다

평소 좋아하는 음악이 틀어졌으면 좋겠다. 근처에는 꽃이 놓여지면 좋을 것 같다. 생화의 향을 맡고 싶다. 살아있는 냄새를 맡으며 죽음이 다가와도 안심할 수 있게 말이다. 말 없이 손을 꼭 잡아주고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면 좋겠다. 누군가의 울음섞인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다. 


왜 죽음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는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알고 난 뒤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주제인 만큼 쉽게 다루기 어려웠기 때문에 뒤로 미뤄뒀는데, 오늘 죽음에 관한 글을 읽고 이제 써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보고 있는 체르노빌 드라마도 한몫한 것 같기도 하고. 죽음계획서에는 죽음 이후의 장례절차, 전문의, 장기기증 여부 등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미리 이런 절차들을 생각해보면 무엇을 대비해야 할지 알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미지출처: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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