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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내린 May 29. 2020

룸메가 없는 그 방

이른 저녁즈음 룸메 L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캐리어에 짐을 넣기 시작했다. 집주인분과 대화하는 것을 언뜻 듣기론 그날 중으로 짐을 빼고 다음달에 돈을 지불할 거라고 했다. 아예 가는구나. 나는 마음 한켠에 허전함이 느껴졌다. L은 아직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이다. 그는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 서울에서 집을 알아보던 중에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먼저 계약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대학교가 문을 닫지 않았다면 계속 여기서 지내며 다녔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수업이 전부 온라인 강의로 전환되면서 이 집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본가 근처에서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매번 본가와 서울을 왔다갔다 해야하다보니 일주일에 이틀 정도만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 사는 돈도 L이 낸다는데 너무 아깝지 않나 생각했다.


L도 점차 월세에 부담을 느꼈는지 결국 같이 산지 한달 반 만에 다시 본가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얼마 안되는 짐을 마저 챙기고 부모님이 오시길 기다리는 동안 L과 짧게 얘기를 나눴다. '집을 아예 나가는 건지', '앞으로 집에서 학업을 이어갈 건지' 등등 간단한 안부인사도 전했다. 얼마 보지도 않은 사이였지만 금방 정이 들었는지, 그가 이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 쓸쓸했다.


그는 내년 1학기까지 남은 상황이라 취업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조언을 주려고 했지만 나중에 대화를 끝내고 나서 내 생각을 함부로 조언이란답시고 얘기한 건 아닌지 미안해 했었다. 내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과 다르듯이,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 이후로 되도록이면 조언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만 지금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일단 경험해보라 정도만 얘기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잠시 화장실에 있는 동안 룸메는 집주인과 대화를 끝내고 본가로 내려갔다. 나는 텅 빈 방을 한참 보다 접이식 테이블 위에 놓인 책 사이에서 종이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인사를 못 드리고 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고맙다는 글이 써져있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전했어야 했는데, 나는 곧장 카톡으로 그동안 함께 지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내 마음에 걸렸던 조언에 관해서도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니 꼭 따를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조금 뒤 L에게서 답장이 왔다.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인연이 되면 또 만나뵈면 좋겠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오늘 저녁에 집주인분이 룸메가 사용하던 침구를 정리하면서 새로 룸메를 찾아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첫 룸메와 트러블 없이 잘 지내온 만큼 다음 룸메도 잘 맞는 친구가 왔으면 좋겠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지 출처: Photo by Alexander Possingha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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