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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내린 May 31. 2020

핑시선을 타고 지우펀으로 가다

인생 여행 이야기

대만 여행 셋째날 나는 핑시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 옆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여섯이 모여 앉아 있었다. 대만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또래 아이들이 기차 한칸에 모여 있는 걸 보아 수학여행을 가는 것 같았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여자아이는 휴대폰을 보면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언뜻보니 빙고게임 비스무리하게 문답을 하는 방식인 것 같다. 여자아이가 휴대폰에 적힌 글을 읽으면 아이들이 한명씩 답을 얘기하고 정답이 맞는지 확인하는 식이였다. 재잘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여기에 한번 껴보면 좋겠다 싶었다. 물론 언어 장벽 때문에 지켜보고 말았지만.


보통 대만여행에서 지우펀을 갈 때는 예스지(예류, 스펀, 지우펀) 버스투어를 이용하지만, 나는 그 대신 뚜벅이 여행을 택했다. 핑시선 기차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지우펀이었고, 그 사이에 허우통 고양이 마을, 스펀 두 곳을 들렀다.


핑시선 여행 경로


허우통 고양이 마을은 지명 그대로 고양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더운 여름에는 길가에 늘어져 자는 경우가 많고 때에 따라선 고양이를 많이 못 볼 수도 있다. 그점이 조금 걱정했지만 뻔하지 않는 관광지에 가고 싶은 생각에 핑시선 첫 여행지로 정했다. 허우통에서 내리고 나면 고양이 그림이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걸 볼 수 있다. 역사를 나서는 길에 누워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고 오늘은 고양이를 많이 볼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설렜다.


역사 안 고양이 그림

허우통은 그다지 인기 있는 여행지는 아니였다. 내리는 사람도 적을 뿐더러 벽화나 일부 장식물을 제외하고는 조그만 마을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 탄광마을이었다 고양이 마을 관광지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작은 관광지라 실망하긴 했지만 드문 드문 보이는 고양이를 보며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지붕 위에 있는 거대한 고양이


누워있는 고양이들

다음 여행지는 스펀이었다. 대만을 가기 전에 한창 대만 영화에 빠져있었고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펀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영화에서 주인공이 풍등을 날리는 곳이었다. 영화에서 풍등에 소원을 적고 날리는 장면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나는 그 거리에 서서 영화 속 분위기에 취하고 싶었다.


혼자서 온 여행이라 풍등을 날리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풍등을 날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근처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풍등을 띄우는 걸 봤는데 풍등에 적힌 글귀 대부분 가족에 대한 사랑, 건강함 기원 그리고 연애와 취업 성공에 관한 내용이었다. 살아온 배경이 달라도 바라는 것은 모두가 같았다.

철길 양옆에 풍등을 권하는 호객꾼이 많았다

스펀의 특이한 점이라 하면 핑시선이 지나가는 철길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철길이 위험하기 때문에 핑시선이 올 때마다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어 사람들이 대피하도록 했다. 나는 핑시선이 빠져나간 후 철길에 서서 풍등이 날아가는 하늘을 찍었다. 구름이 많이 낀 날씨라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지우펀은 홍등이 켜진 밤 거리로 유명하다. 저녁즈음에 가면 가게들이 문을 닫고 홍등이 켜져 장관을 이룬다. 그 시간대에는 지옥펀이라 불릴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 낑겨가야기 때문에 늦기 전에 서둘러 지우펀으로 향했다. 내 목적은 아메이차주관에 가서 우롱차를 마시는 것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그곳에서 차를 마시면 특이한 경험이 될 거라 생각했다.


아메이차주관 건물

아메이차주관에 막 들어서자 전통적인 목재로 이루어진 실내에서 창밖을 바라보길 기대했었다. 뜻밖에도 가게 직원은 건물 왼편 임시로 만든 천막에 자리를 안내해줬다. 이게 아닌데 싶어 당황했지만 주변에 다른 관광객은 아무렇지 않아해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대신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내가 기대했던 고즈넉한 분위기가 아니야..

우롱차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그날 날씨가 무더웠기 때문에 차가운 걸 시켰다. 뜨거운 걸 시키면 직접 찻잎을 우려볼 수 있는데 아쉬웠다. 그래도 우롱차 맛이 좋았기 때문에 같이 나온 다과를 곁들이며 유유히 시간을 보냈다. 이때 마신 우롱차에 반해 대만 우롱차만 잔뜩 사와 한국에서 두달 내내 우려 먹은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부터 우중충했지만 지우펀까지 오는 길에 비가 오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다. 슬슬 나가보려 할 때쯤 갑자기 비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세차게 내렸다. 천막이 흔들릴 정도로 굉장한 바람이 불어 무서우면서도 스릴감(?)이 있었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게 좋지만 슬슬 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더구나 버스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밖을 나섰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나오자 마자 알게 됐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거리마다 사람이 몰려있었는데 비가 오자마자 거리가 한산해졌다. 아메이차주관 옆에는 아메이차주관 건물을 찍기 좋은 핫스팟이 있었다. 거기엔 한국인 관광객들과 가이드가 비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가이드분은 한 명씩 앞에 서라며 "지금 아니면 찍기 어려워요."라고 외쳤다. 그 말을 듣자 이건 기회다 싶었다. 구글링에서 홍등거리 사진을 보면 다 천장을 찍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사람이 거리에 꽉 차 있어 주변을 찍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 또한 비가 오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찍지 않으려고 천장만 찍고 말았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지금은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거리를 마음껏 찍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비바람이 부는 걸 아랑곳 않고 길 위에 풍경을 여러 차례 찍었다. 덕분에 비에 홀딱 젖고 말았지만 나는 대만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 중에 이때 찍은 사진이 가장 흡족스럽다.

운치있게 찍은 지우펀 거리


여행을 자주 가지 않는 나로선 대만여행은 홀로 해외에 가보는 첫 여행이었다. 비행기에 타기 전까지만 해도 온통 교통편 때문에 걱정이 많았지만 여행지를 돌아다니면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지우펀까지 가는 길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TRA 열차에서 핑시선으로 갈아타는 방법을 몰라 헤매기도 했고, 지우펀으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려다 좌석이 없다고 거절당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대치 않은 뜻밖의 것들을 마주치면서 행복했다. 여행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철저히 준비를 해도 계획에 없는 일들이 순간 순간 벌어지지만 그러면서도 하나씩 헤쳐나가는 나를 돌아보며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행 막바지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비가 그친 후 큰 무지개를 보았다.

 

지하철 창문 밖으로 보이는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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