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비내린 Jul 11. 2020

주니어 기획자가 느끼는 고민들

기획자가 됐다고 끝난게 아니야

각오는 했었는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움을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비스기획 직무를 준비하면서 관련 글을 참으로 많이도 봤었다. 기획자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이고, 일을 하면서 뭐가 힘든지 미리 알고 가면 적응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었다. 상대를 설득해서 일을 추진하는 것이 기획자의 숙명이라고 말했던가. 글에서 워낙 많이 회자되기도 해서 '그래, 커뮤니케이션이 어렵지 암.' 하며 단단히 마음먹고 일을 시작했다. 기획자가 겪는 전체 어려움을 100%라고 봤을 때, 그중 커뮤니케이션이 60%라고 예상했다면 실제 체감상 난이도는 90% 이상이었다.


제안한 아이디어가 세 번이나 퇴짜를 맞다 보면 아무리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더라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이건 이래서 별로라는 피드백을 듣고 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주말을 맞이했다. 나는 오전에 하천을 따라 길을 걸으며 뭐가 잘못된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팀원과 대화했던 장면을 복기하고 하나씩 되짚어보니 모호했던 점들이 점차 뚜렷해졌다.


그중 하나는 '왜 나는 반대하는 의견을 들었을 때 언짢아했는가'였다. 이것은 심리적인 압박과 관련 있었다. 내 제안에 계속 의구심을 보이는 일이 여러 번 생기니 (실제론 그렇지 않을 지라도) 내가 부정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일이 진척되지 않을 때마다 위기감을 느꼈는데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하루 반나절을 '왜'라는 질문을 여러 번 던지며 내면을 파고드니 그 근원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직무의 필요성'에 대한 의심이었다.


나는 기획이란 단어에 집착했었다. 기획을 하는 사람이 아이디어를 제안해야 하고 그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조율하는 과정이 기획자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개발자도 디자이너도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서비스에 반영하는 이 조직에서 기획자가 과연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기획자로 뽑힌 이상 필요성을 보여야 했고 기획자가 제시한 의견이 반영돼야 존재감이 증명된다고 생각했었다. 몇 번의 퇴짜가 부정당한 기분이 들게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자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기획자가 없는 프로덕트 조직을 상상해봤다. 개발자와 디자이너만 있는 상황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다들 프로덕트에 대한 자신만의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란 어렵다. 여러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중재자 없이 모두가 동의할만한 결정을 내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여기서 기준이 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애초에 구현할 것들을 미리 만들어놓고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현재 목표로 하는 것이 뭔지 명확히 정의하고, 이 일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해관계자에게 목표를 상기시키며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야 한다. 혹여 기획자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더라도 이 목표와 맞다고 생각하면 그걸 추진해야 한다. 기획자만 제안할 수 있다는 권리란 없다.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한다면 서비스로 구현될 수 있도록 논의의 장을 만들고 스펙을 정리하고 일정에 맞춰 만들면 되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슬랙으로 모든 협의과정을 공개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이 소통하는 방식과 내가 하는 방식을 비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질문을 한다. 그리고 하나의 선택지가 아닌 여러 선택지를 보여준다. 나는 내 기획안이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잠정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괜찮은지를 여쭤봤다. 초창기부터 서비스를 만들어온 베테랑 팀원들에 비해 서비스의 전후 히스토리를 잘 알 턱이 있나. 내 의견이 당연히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나는 기획자로서 제대로 역할을 다하는지 점검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각각의 물음에 예/아니오를 체크했다.


나는 팀원들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알고 있는가? 아니오.

나는 팀원에게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기능을 제안했는지 설명했는가? 아니오.

나는 설득을 할 때 이 기능을 사용할 대상과 예상되는 가치를 얘기했는가? 아니오.


고집과 소신은 한 끗 차이다. 명확한 기준 없이 내 의견이 맞다고만 주장한다면 고집에 불과하다. 우리 조직이 OKR을 기준으로 일하는 만큼 나 또한 OKR을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내가 주장한 것들이 OKR과 관련이 있는지를 늘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 고집만 하는 기획자가 아니라 소신 있는 기획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일에 적응하느라 UX 관련한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적응하는 과정이라 앞으로도 회고식의 글로 종종 찾아뵐 듯하다. 일을 하면서 든 생각은, 아무리 글을 많이 읽고 대비한다고 해도 직접 해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던 글들도 막다른 벽에 부딪히면서 다시 찾게 되고 곱씹게 된다. 이 글은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 기획을 시작한 주니어 기획자가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하는 생각에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다른 누군가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언젠가 "그땐 이게 어려웠었지"하며 돌아볼 수 있는 경험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나 할 수 있는 앱 크리틱 분석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