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부산에서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일정이나 개인 사정으로 매번 한 명, 두 명씩은 빠지곤 했는데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코로나 19로 밖에서 돌아다닐 수 없으니 실내에서 뭘 하고 놀까 하던 중에 한 친구가 '나, 보드게임 여러 개 있는데 갖고 와서 하는 건 어때?"라고 제안했다. 저녁식사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긴 대화의 끝이 보일 때쯤 친구는 슬슬 해보자며 가방에서 꺼내왔다. 하나는 뒤죽박죽 서커스이고, 다른 하나는 딕싯이었다. 상담일을 하던 친구는 상담할 때 보드게임을 가지고도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보드게임을 하나씩 해보면서 재미 이상으로 친구가 상담한 내담자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상상해보게 됐다.
뒤죽박죽 서커스는 카드에 제시된 규칙에 맞춰 블록을 탑처럼 쌓는 게임이다. 룰은 간단하다. 쌓은 블록과 동일한 카드는 내려놓고 새 카드를 가져오면 된다. 네 장의 카드를 먼저 내려놓은 사람이 이긴다. 이 게임의 묘미는 다른 사람이 쌓은 탑을 내 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블록을 가져올 때는 반드시 가져올 블록만 한 손으로 잡고 그 위에 얼마나 많은 블록이 있든지 간에 떨어트리는 일 없어야 한다. 만약 블록이 하나라도 떨어지면 내려놓은 카드를 빼야 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옮겨야 한다.
친구는 블록을 옮기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불안 장애가 있는 아이를 상담할 때 이 보드게임을 쓴다고 했다. "원래 상어가 쫓아오는 게임을 하면 동전을 먹어야 하는 데, 불안이 높은 애들은 먹지 않고 피하기만 해." 친구는 불안이 높은 아이에게 게임을 여러 차례 하면서 낮은 불안 수준부터 조금씩 넘어서는 훈련을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문득 작년 1월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기억났다.
좌절을 유연히 극복하게 하는 회복탄력성은 축적된 좌절 경험에서 나옵니다. 더욱 정확히는 '최적의 좌절' 경험에서 나오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되는 일도 있고, 되지 않는 일도 있구나'를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아이가 사라지는 세상> 중
우리가 실수에 관대하지 못하는 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지는 건 사소한 좌절부터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 세대의 학창 시절은 정해진 길을 한 치라도 벗어나는 건 뒤쳐지는 것, 이상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좌절을 경험할 새 없이 정답을 외우고 부모가, 사회가 말하는 대로 따랐기 때문에 더더욱 무언가를 시도하기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블록을 떨어뜨리는 좌절 경험을 통해 조금씩 불안을 극복하게 하려는 친구의 상담방식을 알면서 어릴 때부터 좌절 경험을 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딕싯은 한 사람이 카드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설명하면 나머지가 설명한 그림과 비슷한 카드를 낸 후 설명한 그림을 맞추는 보드게임이다. 사람마다 현재 기분이나 경험적 배경 등에 따라 같은 카드라도 다르게 해석한다. 이런 점 때문에 친구는 상담에서는 말로 표현하는 데 미숙한 아이에게 카드를 통해 속마음을 꺼낼 수 있게 하는 데 사용한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낸 카드를 척척 맞추는 것과 달리 내 카드를 묘사하는 건 어려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데로 설명했지만 너무 쉽게 맞춰버리면서 조금 전략을 달리해야 했다. 이미 여러 번 딕싯을 했던 친구는 특이하게 묘사를 했었다. 가령 '내가 현재 느끼는 감정'이라던가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내 모습'과 같이 자신과 관련되게 설명했다. 나는 친구를 따라서 '현재 내가 고치고 싶은 것', '미래의 내 모습'과 같이 점차 추상적이고 개인적으로 묘사했다.
이렇게 묘사하면서 친구들이 생각했던 내 모습이 어떤지를 솔직하게 들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는 속 얘기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특히 그날 아차 싶었던 내 모습을 친구가 정확히 꼬집어 줘서 뜨끔했었다. "네가 대화하는 중에도 가끔씩 폰을 보고 있어서 뭔가 계속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워낙 SNS에 올라오는 자료를 챙겨보고 새로운 뉴스거리를 찾는 게 습관이라 그것이 스트레스로 받을 줄은 생각을 못했다. SNS에 들려오는 소식을 챙겨보는 것이 조금씩 지쳐갈 즈음이었으니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던 걸게다. 현재 함께 있는 친구들에 집중을 못한 태도를 반성하고 그 뒤로 대화 중에는 폰을 꺼내지 않았다.
한창 오프라인 커뮤니티에 다니는 걸 좋아했을 때 새로운 사람들과 어색한 대화를 풀 수 있는 질문 카드를 산 적이 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벗어나 낯선 주제로 깊이 있는 얘기를 할 수 있어 재미가 있었다. 그 뒤로 다른 질문 카드는 없나 하고 텀블벅과 같은 펀딩 사이트를 뒤적이곤 했는데, 이후로 집과 직장 위주로만 다니면서 흥미에서 멀어졌었던 것 같다. 이번에 보드게임을 경험한 계기로 재미를 추구하는 것 이상의 또 다른 묘미를 알게 돼서 즐거웠다. 딕싯은 개인적으로 만족했던 게임이라 소장하고 싶은 보드게임 중 하나다.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대화를 벗어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속 깊은 대화를 하고 싶다면 보드게임을 꺼내어 같이 해보자고 권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