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간극을 메우고 중요한 이야기와 잊힌 삶을 공유하는 건 구술 역사가의 몫이다.
현대 컴퓨터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에니악(ENIAC)과 관련해 알려진 인물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에니악의 프로그래밍을 맡은 이가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컴퓨터 역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어쩌다 언급도 못 된 채 사라졌는지 안타까웠다. 저자인 캐시 클라이먼 또한 비슷한 감정이었으리라. 그는 우연히 에니악 옆에 포즈를 취한 여성들이 담긴 흑백사진을 보며 어느 누구도 이 여성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사진에 함께 찍혀 있는지 모른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졌다. 이 책은 에니악 프로그래밍을 맡은 여성 개발자들을 만나 여러 번의 인터뷰와 애니악 관련 역사적 자료와 저서를 정리해 옮겨온결과물이다.
흔히 전자기기로 알고 있는 컴퓨터(Computer)가 원래는 계산하는 사람(Compute + -er)을 의미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애니악이 나오기 전 2차 세계대전 중 포탄을 정확한 위치에 쏘기 위한 탄도학 계산을 수행한 사람들은 여성 컴퓨터들이었다. 초기엔 탁상용 계산기를 활용해 포탄의 궤도를 계산했는데, 포탄이 떨어지는 40초의 순간을 위해 몇 시간의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전쟁이격화되면서 더 많은 탄도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 압박감을 받았던 허먼 박사는 존 모클리와 프레스퍼 에커트와 함께 진공관으로 만든 최초의 전자 컴퓨터를 구상했고 약 2년을 걸쳐 에니악을 완성했다. 에니악이 작동되기 위해선 카드 판독기, 카드 천공기 등 장비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를 담당하게 된 여섯 명의 여성들이 바로 이 책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에니악 여성 개발자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이 여성들을 에니악 조작원으로 평가절하 한 이들이 있었으나, 이는 에니악 역사의 단편만 바라볼 때 얘기다. 이 책에서는 여성 개발자들이 에니악 프로그램을 설계하면서 오늘날 개발자들이 수행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도입한 점을 언급한다. 가령, 프로그램 개발 중 발생하는 시스템 오류를 찾아내고 원인을 파악하는 것을 디버깅(debugging)이라고 한다. 디버깅의 한 기법으로 break point는 연산 중 특정 시점에서 멈추고 계산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을 말하는데, 에니악의 각 유닛을 물리적으로 중단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작업에서 유래되었다. 기기에 달린 스위치와 케이블 위치를 조작하는 방식이프로그래밍을 연상하기 어려웠지만, 물리적으로 움직여서 작동시키냐 코드를 작성해서 작동시키냐 차이일 뿐 프로그래밍 방식은 큰 틀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말미에 성별, 인종, 종교를 구분하지 않고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특정 성이나 인종이 쏠려 있는 분야일수록 상대적으로 소수인 사람들은 업계에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압박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집단은 특정되기 쉬워서 누군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개인이 아닌 그 집단 전체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인류 역사의 비극적인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대부분의 남성이 전쟁에 참여한 특수한 상황에서 여성의 경제적 활동에 대한 기회가 늘어난 점에 있어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컴퓨팅 분야에 여성들의 비중은 적다. 그렇기에 '여성'이기에 실력을 증명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질 수 있다. 먄약 그렇다면 새로운 분야에 호기롭게 도전하며 에니악을 설계한 이 여성 개발자들의 이야기를 읽기 바란다.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 제한했던 한계를 뛰어넘어 뛰어난 성과를 내는데 많은 영감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