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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내린 Mar 27. 2020

내게 영향을 준 세 사람

12일 차 자기발견

세상에 글만큼 정직한 것은 없습니다. 글은 그 사람을 훤히 다 보여줍니다. 생각이 얼마나 정교한지, 얼마나 정직한지, 얼마나 절실한지 다 드러납니다.
<손바닥 자서전 특강> 134, 135p


중학교 국어수업 때 짧은 단편소설로 발레리나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엔 글을 어렵게 쓰는 거라 생각해서 미사여구도 팍팍 넣고, 어려운 단어도 넣고 해야 소설 답다고 생각했다. 문장마다 표현에 신경 쓰니 사건은 더디게 흘렀고 마감시간을 코 앞에 두고 겨우 마무리했다. 선생님이 초반에 글을 읽으시고 잘 쓴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정쩡한 결말을 보여드리기 창피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쓴 단편소설을 끝으로 한동안 글을 안 쓰다 졸업 후에 사색하는 글을 조금씩 썼다. 남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서 힘을 빼서 썼던 것 같다. 그때 글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보게 됐는데, 맞춤법도 틀리고 주어 서술어도 안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참 정직하게 생각을 담았구나 싶었다. 아마 중학생 때 쓴 소설을 읽는다면 무척 창피했을 것이다. 그 소설엔 화려한 기교만 가득히 넣은 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투박하더라도 진솔한 생각을 담으려 한다.


힘을 빼고,

떠오르는 단어를 음미하고,

흰 바탕에 단어들을 한 자씩 옮기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을 채워 넣는다.

자, 그럼 시작.



토토로를 좋아하는 J


J는 생일이 되면 손편지를 주곤 했다. 편지에는 '할매되도 친하게 지내자'는 말이 마지막에 적혀 있었는데, 당시엔 '할매된다'는 말에 웃어넘겼다. J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대학생활로 바빠 4년간 거의 연락을 못했지만 나중에 내가 서울로 올라온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종종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J는 회사에 다니면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우리가 같은 선에서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보다 멀리 앞서 나가고 있었다. J와 대화를 할수록 생각의 깊이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이미 올곧게 세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J에게 조언을 구하게 됐고, 그때마다 현명한 답을 내놓는 J를 보며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J와 의지하는 사이가 되면서 편지에 써 있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J는 평생 친구로서, 배울 수 있는 사람으로서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다.



첫 콜드메일에 응해주신 S


모든 걸 혼자서 하려는 생각을 내려놓자고 결심한 날,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다. 누군가 찾고자 하면 길이 보인다 했던가. 필요한 순간에 이메일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사실 그 메일은 취업 멘토와 비디오 챗을 해보라는 광고였다. 뭐 하는 건가 싶어 링크를 클릭했는데 거기엔 멘토마다 자세한 소개와 컨택 메일이 적혀 있었다. 현업자를 만나야겠다고 이전부터 고려했어서 이 기회를 잡자 하고 바로 연락했다.


늦은 저녁시간이었음에도 바로 답장이 왔다. 출발이 좋은 신호였다. 나는 흥분한 마음을 감추고 평소에 취업 관련 에세이를 잘 봤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궁금한 점을 여쭤봐도 괜찮냐고 물었다. S님의 에세이에는 취준생들을 돕고 싶은 진심이 묻어나 있었고,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변해서 이분이라면 만나주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일주일 뒤 1시간만 만나 봬서 상담을 받아도 되는지 여쭤봤다. 하루가 지나도 답장이 없으셔서 어렵구나 싶었는데, 3일 뒤에 괜찮다는 답장을 받았다.


당일에 나는 '기업에 입사하는 법'이 아닌 '기획자로서 지금 해야 할 것들'에 대해 묻기로 결심하고 자리에 임했다. S님께도 질문을 하면서 '기업이 좋아하는 자소서 작성법이나 면접 답변'이 아니라 '기획자로서 이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걸 알았으면 좋겠다'는 걸 듣고 싶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S님도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셨고, 취업시장에서 들을 수 없었던 귀중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는 기획자가 갖춰야 할 자질에 관한 것이었다. 기획을 잘한다는 것은 기업이 추구하는 서비스의 핵심 가치를 이해하고, 비즈니스 모델로 그려낼 줄 아는 것이다. 처음 서비스 기획을 접하면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플로우를 그리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라 착각하기 쉽다. 나 또한 UI를 잘 그리고 정책만 잘 만들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스킬적인 부분만 공부했었다.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와 기획자의 경계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며 갈피를 못 잡았었다.


기획자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스스로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했기에 잘못된 방향으로 준비를 했던 것이다. S님은 중요한 건 '비즈니스 마인드'라는 말씀과 함께 이를 공부하기 위해선 어떤 관점으로 서비스를 분석해야는 지도 상세히 설명해주셨다. 덕분에 기획을 공부하는 법을 배웠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현재 연재하고 있는 UX 분석 매거진도 구성 방식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어두운 내면도 바꿀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준 R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진가를 못 알아봤을 분이시다. R은 '인간 본성의 법칙' 책의 저자로, 인간의 어두운 면이 왜 생겼는지 그리고 이런 어두운 면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전작 권력의 법칙, 유혹의 기술처럼 이 책은 많은 부분이 사람을 다루는 법을 다뤘지만 나는 도리어 이 책 덕분에 내면을 이해하고 치유되었다. 어두운 면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몇 가지는 내가 경험했던 것들이고, 왜 어떤 상황만 되면 싫은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런 어두운 면을 좋은 방향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소개했다는 점이었다. 책에는 이런 점은 나쁘니까 감춰라가 아니라 이 에너지를 상대가 아닌 일에 돌리고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원칙을 이해하고 나서 글을 쓸 때나 조언을 구할 때 솔직하게 내 어두운 면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래야 이 어두운 면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하고,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거나 대상을 다른 곳으로 돌려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글을 쓰면서도 자기 검열을 하곤 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솔직하게 드러내도 괜찮다는 것을 안다. 감추는 것보다 오픈하면서 오히려 그 단점이 치명적인 게 아니고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는 것들이란 걸 이해하고 있다.


친한 친구인 J는 내게 관계를 유지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알려줬다. 선배이자 멘토인 S는 내게 기획자가 갖춰야 할 자질과 같이 일하기 좋은 동료의 자세를 알려줬다. 책의 저자 R은 내면을 탐구하는 법과 세대를 이해하고 그 흐름에 앞서 나가는 법을 알려줬다. 이 자리를 빌어 J, S, R 세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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