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이론의 대가 알라이다 아스만도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기억과 망각에 대해 말했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장소와 연결 지을 때 가장 오래도록 기억되고, 반대로 장소를 생각해내면 거기에 얽힌 사건이 연결된다고 합니다. <손바닥 자서전 특강> 81p
9일 차 자기발견에서 인생의 변곡점을 쓰면서 문득 내가 다녔던 학교가 지금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 한 번도 모교를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검색창에 학교 이름을 입력하는 것이 낯설었다. 홈페이지를 클릭했을 때 놀랐던 건 기대했던 학교 홈페이지가 아닌 I AM SCHOOL이라는 학교 소식 플랫폼이 가장 먼저 떴다는 점이었다. 우리 때는 스마트폰이 막 들어오는 시점이었고 학교 소식 관련한 앱은 더군다나 없었기 때문에 새삼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교육청에 들어가 겨우겨우 학교 홈페이지를 찾았다. 학교 앨범에는 교실 모습이 찍혀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았던 이미지 그대로였다. 우리 사진도 있나 싶어 게시물 목록 맨 끝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내가 졸업한 이후에 홈페이지가 새로 개편되면서 이전 자료들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우리 학교가 아직도 건실하게 있다는 걸 알아서 기뻤지만, 한편으로 2013년 이전의 추억이 영원히 묻혀버린 것만 같아 아쉬웠다.
17살의 나에게
고등학교 입학식 날 기억하니? 중학교에선 나름 반에서 1등도 하며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해서 고등학교에선 그렇지 못한 사실을 알고 좌절했었지. 심지어 전교 1등 친구와 같은 반이 돼서 질투도 많이 했을 거야. 그런데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사회에 나오니까 그 시절에 성적순위는 아무것도 아니더라. 오히려 나는 고등학교 때 반 친구들과 많이 친해지지 못한 게 아쉬워. 친구들과 놀면서 적당히 공부했으면 학교 생활을 즐겁게 보냈을 거라 후회하고 있어. 하지만 너는 성적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떨어지면 패배자라고 생각하고 불안에 떨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귀에 들리지 않겠지.
성적이 너의 가치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너는 2학년이 되면 담임선생님이 등 떠밀어서 반장이 될 거야. 너는 반장이 된다는 게 어떤 책임을 지는지를 몰라서 반장이란 타이틀만 보고 한다고 말하겠지. 그러곤 반 친구들을 잘 다루지 못해서 집에 돌아오면서 숨죽여 울고, 빨리 3학년이 됐으면 하고 속으로 빌 거야. 공부만 하던 너는 선생님한테 반항하고 떠들기에 바쁜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지. 말로는 안 했지만 한심하게 여겼을 거야. 그래서 반장이 돼서도 그 친구들의 얘기를 듣기보단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어.
왜 그때 그 친구들도 공부를 잘하고 싶고 시험기간에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 모습을 모른 척했을까 싶어. 3학년에 같은 반이 되고 내게 "토론 동아리 같이 할래?"라고 물어봐줬을 때 사실은 그 친구들도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을 테지. 그러니 17살의 나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너를 혹사시키지 않았으면 해.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멈추고 네 주변을 돌아봐. 멀리 했던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줘. 그리고 같이 동아리에도 들고 공부도 도와주면서 너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경험을 쌓아봐.
그리고 네게 주어진 기회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해. 오랜만에 네가 다니던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어. 우리 때보다 정말 다양한 체험과 기회들이 열려있더라. 한편으로 학생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멋진 일이고 좋은 경험인지 알까 싶었어. 학생일 때는 학교 안에서만 있다 보니 사회에 나왔을 때 뭐가 필요한지 모르거든. 체험학습도 많이 해보고 사람들도 만나보고 친구들과 모여서 직접 뭔가를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보렴. 나중에 네가 사회에 나갔을 때 그 경험들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이해하게 될 거야.
너는 하루빨리 19살이 되길 바랬지. 대학생이 되면 이제 뭐든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거야. 10년 뒤를 그려보진 않았지만 너는 커리어우먼을 꿈꿨어. 회사에서 멋진 정장을 입고 서류를 들고 당차게 서있는 여자. 네 기대와 다르게 요즘에는 정장보다는 편안한 복장을 입고 다녀. 정장을 입어야 직장인이라고 기대했었다면 기대를 깨버려서 미안해. 나도 정말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막상 공채에 뛰어들어보니 그게 쉽지 않더라. 주변 지인들은 하나둘씩 좋은 기업에 취업하는 걸 보고 무척 초조했었어. 지금 내 나이가 커트라인에 걸려서 더 이상 받아줄 곳이 없으면 어쩌나 두려웠지.
정장을 입지도, 정규직으로 입사하지도 못했지만 어떤 회사에 가든 일을 할 때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을 해냈다는 것만은 기억해. 단지 나는 나와 맞는 회사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야. 네가 꿈꾸던 커리어우먼이 되도록 노력할게. 그러니 너도 너의 시기를 잘 견뎌내길.10년 뒤의 내가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