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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비내린 Mar 30. 2020

환경보호의 목적은 인간인가 아니면 자연인가

한국의 취준생이 바칼로레아 철학에 답하다 (4)

매년 어획으로 잡힌 물고기 개체수 2조 7,000억 마리.

이 수치는 유엔식량농업기구의 통계에서 나온 수치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물고기는 알고 있다> 책에서 알게 되었는데요.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이 자연의 희생에 의한 것을 알고 나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번에 답할 질문은 환경보호는 자연(지구)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바꿔 말하면 생태 중심적 자연관과 인간 중심적 생태관 중 어떤 것을 옹호하는가에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저는 생태 중심적 자연관을 옹호합니다. 환경보호는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생태계를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환경보호의 당위성을 들 때 흔히 '다음 세대를 위해', '인류의 미래를 위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동물행동학을 배우면서 이런 주장들을 접할 때면 마음 한켠에 불편한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인간이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다는 생각은 자칫 인간이 우월하고 그 외 동물은 인간의 하위에 존재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낳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일부 학자들 포함 일반인들 중에서도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있고, 인간만이 가진 특성을 중요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있으나 여기선 논외에 해당하므로,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환경보호의 목적이 인간을 위한 것이게 되면 다음과 같은 비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바로 "인간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생태계를 파괴해도 되는가."에 답을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적 생태관의 관점에서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고, 나머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인지해야 할 사실은 인류가 지구 역사에 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보면, 최초의 인류의 출현은 오후 11시 59분 55초입니다. 24시간 중에 겨우 5초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알도 레이폴드의 대지윤리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환경은 지구 역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의 안식처이고, 인간도 마찬가지로 언제 끝날지 모를 인류의 역사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 생태관을 비판하고 생태 중심적 자연관을 제시했던 알도 레이폴드는 저서 <모래 군의 열두 달>에서 대지윤리에 대해 설명합니다. 대지윤리에서는 인간의 지위 역시 대지의 관리자, 정복자가 아닌, 다른 구성원들과 같이 평범한 하나의 구성원이라고 봅니다. 생태계는 생물과 무생물이 먹이사슬을 매개로 긴밀하게 서로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를 임의로 균형을 깨트리게 된다면 생태계는 파괴되고 인간을 포함 모든 생명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대지윤리는 인간이 자원의 사용과 관리를 금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생태계의 자원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자원들이 계속 존재할 권리는 보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인간에 당장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멸종위기 동물을 구하고, 생태보전을 위해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환경보호가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인간의 경제적인 효용에 따라 차별적으로 환경보호를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태 중심적 자연관에서는 차별적인 환경보호를 지적하며 생태계 모든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명시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 대립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안다면 환경보호의 목적은 바로 자연을 위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Photo by Photo Board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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