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위로하는 사람이 되고픈 소박한 노력
너무 매몰차다며 미움받는 진실이 때로는 우리를 지키는 포기할 수 없는 작은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너는 너고 나는 나일 뿐이라는 엄격한 구분 같은 게 있다. 힘들었던 시절, 따가운 언어들보다 내게 더 모질었던 건 천진하게 삶을 침범하는 무지함이었다. 나의 일을 겪어내지 않은 이가 사려 없이 내뱉는 이해라는 말이 그렇게 공허할 수 없었다. 끝끝내 어렴풋할 수밖에 없는 이해는 결국 몰이해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 일들도 있다. 결코 충실할 수 없는 앎의 정도에 이해라는 말을 남발하지 않기를 바랐던 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선의가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니다. 위로의 의도가 위로로만 다가올 수 없는 세상의 복잡한 공식이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느껴지는 게 통증인 것에 별다른 방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좋자고 하는 말인 의례적 위로를 굳이 애써가며 '싸구려'라고 치부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즐겁지는 않다. 되려 그때 내게 공명이 되었던 건, 우리가 타자라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 낸 다정한 초라함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기적같이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기적 없는 세상살이가 더 이상은 너무 모질지는 않기를 바란다는 응원이 그저 뭉클했다. 함부로 나를 온전히 이해한다며 자신을 섣불리 오해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내가 일어나기를 바랐던 마음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끔 눈물겨워진다.
그래서인지, 아파하는 한 사람을 어쩌다 감히 다독일 땐, 나 역시도 이해한다는 말을 되도록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경계한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렇다. 마음으로 앓되 그럼에도 이해했다는 오만만큼은 지양하려 애쓴다. 넘겨짚지 않고, 먼저 헤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아는 게 정말 없다며 의도적으로 열등생이 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도 겪어보지 않은 삶을 이 정도면 다 안다는 으스댐을 피하는 게 여전히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런 걸 보면 이해라는 수단을 통해 어쩌면 그 사람의 삶과 궤를 맞추려는 노력은 우리의 본능일 수도 있다. 다만 조금 더 큰 응원을 준 각별한 사람에게는, 되려 우리 둘이 영원히 같을 수 없다는 비정한 진실을 몇 번이고 되뇌고는 한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듣기만 해도 내 마음이 먼저 내려앉은 그 아픈 소식을 접했을 때, 당사자인 그 사람의 속상함을 어떤 재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문장이 있다.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도 우린 함부로 짐작해서는 안 된다. 그건 우리의 소중한 이를 아무렴 어떠냐며 무작정 방치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을 위한 노력에 태만하겠다는 슬픈 선언 또한 아니다. 다만 내 몫의 소명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금방이라도 발화될 것 같은 이해한다는 말을 어떻게든 뒤로 미루고 미루며, 다른 모든 수단들로 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힘이 될 수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고 싶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 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여지라도 존재하냐고 말이다. 순간의 감정은 살아온 모든 역사의 결괏값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겁을 내고 두려워하고 마음을 유난히 앓는 게 다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만큼은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이해라는 게 되도 않은 목표니 당장이라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이해를 목표로 하면서도 끝내 우린 완전한 이해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함께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분명 어렵다. 얄팍한 앎은 우리가 그 사람을 다 이해했다고 착각하도록 쉽게 추동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럴 때도 어떻게든 우리의 모자랄 수밖에 없음은 인정돼야 하고, 그 사람에 대한 공부를 놓아서는 안 된다. 쉽게 내뱉어진 이해가 공허하여 아프다면, 이해에 대한 추구 없는 위로는 사람을 외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토록이나 어렵게 누군가를 위로해야 되나 싶지만, 쉽게 범람하는 슬픔에 우리를 어렵게라도 지켜내는 건 이토록 미약한 응원들이다. 더욱이 우리가 힘이 되어주고자 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진심으로 소중한 사람이 아니던가. 마음이 무너진 사람에게 그래도 삶을 이어가고 다시 살아감을 긍정하게 하려는 것인데, 그 노력이 수고롭지 않으면 되려 이상한 것이다. 공부에 끝이 없다는 건 비단 지식에 대한 학습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람에 대한 열렬한 탐독이 어쩌면 더욱 절실한 공부다.
세상이 너무 진실뿐인 구석도 있어서, 영원히 각자는 타자로 머물게 된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우리는 우리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일 수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일 수밖에 없는 미워빠진 삶의 층위에서 비로소 우린 서로의 손을 온전히 잡을 수 있다. 때로는 아파해도 괜찮다고, 때로는 아팠겠다고, 또 가끔은 아픔이 꼭 언젠가는 덜해지기를 소망한다는 응원을 건네겠지만 우선 그 사람에게 먼저 느껴지는 건 바쁘게 꼭 잡은 손의 온기일 테다. 그 소박한 따뜻함이 때로는 한 사람의 생을 구한다. 어떤 소설가는 한 사람을 무너뜨린 건 실업 등의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 사람을 향했던 차가운 말 따위라는 문장을 남긴 적 있다. 마찬가지다. 무너진 한 사람을 살리는 것도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진심 어린 위로와 다정한 다독임이다. 아팠던 경험으로, 나는 그렇게 나의 일을 아파하면서도 그럼에도 내가 딛고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질 때 그래도 세상 어딘가에 기댈 곳이 있음을 느끼고는 하였다. 까다로운 어떤 이의 모난 투정일 수 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면 됐지 뭘 그렇게 위로를 듣는 주제에 가려대냐고도 힐난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해한다는 선의도 분명 감사한 마음이다. 세상 누군가가 말이라도 나를 이해해 준다고 하는 건데, 그 마음이 고깝게 느껴지는 내가 너무 모난 건 맞다. 그러나 세상엔 조금 더 사려 깊은 생각과 언어로 짜여진 위로가 됐다. 그 품이 몇 번 나를 구하기도 했다.
잘 위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좋기만 한 삶은 누구에게도 없었던 세상이니, 내게 소중한 이들에게 침울함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을 테다. 누군가의 속 깊은 토닥임이 내게 정말 큰 따스함을 주었던 것처럼, 나도 그들이 슬픔에 잠식되어 있을 때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자 한다. 아니, 정말 소박한 바람으로는, 내가 충분히 사려 깊지 못하게 내뱉은 말이 그 사람을 찌르거나 더 외롭게 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힘은 못 돼도 상처로 기능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주의하겠다는 소리다. 위로도 능력이다. 여러 분야에 숙맥 같은 나이지만, 그래도 위로만큼은 서투르지 않고 싶다. 그런 식으로 자기 효능을 구하겠다는 게 아니라, 조금은, 정말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픈 마음이다. 점점 더 따뜻해지지 않고 있는 세상에서 투명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넬 줄 안다면, 어쩌면 그래도 너무 별로였던 생은 아니었다고 훗날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마음 씀에 능력을 따지고 능숙함을 따지냐는 안일한 마음을 갖는 대신, 계속하여 한 사람을 읽어내려고 노력할 테다. 읽어내고 읽어내다가도 혹여 다 이해한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 때면 나를 꾸짖을 것이다. 맞추기 위해 노력할 건 지식의 정도가 아니라 시선의 높이라는 걸, 가급적 잊지 않으려 애쓰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미숙한 위로를 건넬 뿐이겠지만, 우직한 연습은 평생토록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