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울하지 않지 않아도 괜찮아'는 구절
침울이라는 말은 들여다볼수록 참 슬프게도 생겼다. 우울이 수도 없이 범람했을 절망의 표정을 응시하게 된다. 우리는 마모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슬픔에 둔해지고 있을 거라는 잘못된 믿음을 품고 산다. 너무 알량했던 신뢰가 붕괴되는 데는 그리 더 많은 절망이 필요하지 않다. 울음을 머금은 모든 눈동자에 마음이 얼마간 쓰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슬픔은, 슬픔이다. 슬픔을 달리 대체할 언어가 내 세상에는 없다. 슬픔은 슬픔이라는 말이 비정하게도 잘 어울린다. 슬픔이라는 몹쓸 감정에 차라리 예쁜 이름을 지었더라면 그 알싸한 통증이 조금은 덜했을까. 슬픔이 슬픔이 아니라 딸기나 새싹이었다면, 우린 조금 덜 슬플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공상이다. 슬픔은 슬프게도 슬픔이다. 그래서 우린 슬플 뿐이다. 그 슬픔이 너무 무거울 때 우린 침울해진다. 그러니 침울은 슬픔의 질량값이다. 침울한 이의 발걸음이 가벼울 수 없는 이유다. 사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는 건 슬픔과 조우할 일이 역시나 빈번했다는 의미다. 대체로 성실하게는 살아온 것 같으나, 열심이 최선은 아니다. 꼭 슬픔은 내가 볼품없을 때 나타나 무너진 나를 힘껏 조롱한다. 슬픔이 떠나면 나는 그 자리에 고여 있었다. 어떨 땐 울었고, 아마도 자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을 테다. 세상은 정말이지 넓었으나 마음 편히 기댈 곳이 없었기에 그 넓이가 전혀 유의미하지 않았다. 그저 우울했던 나는 서글픈 침울함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아주 어릴 때 수업을 들으며, 북반구 누군가들은 눈의 색을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우리가 흰색이라고 통칭하는 부류에도 실은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의미였다. 교훈적인 의도의 이야기였으나, 슬픔의 색을 구분해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꼭 무언가를 풍부히 받아들이는 게 좋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스치고 지날 슬픔과 깊게 머무를 우울을 나눌 수 있는 자신이 싫었다. 대체로 우울은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소외되지 않은 외로움도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외로움'이라는 추상 안에 얼마나 많은 구체적 감정들의 스펙트럼이 있는지 역시 절감할 수 있었다. 슬프고 외로웠던 언젠가의 자신이 푸석하게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메마를 수 있는 건 날씨만이 아니었다. 삶에 생기가 없었다. 연속된 인생이었지만 흐름의 기척을 찾아보기는 힘겨웠다. 생이 건조한다는 의미는 삶의 통증에 둔감하다는 말이 아니다. 되려 그 반대다. 불은 마른 날씨에 더욱 잘 붙고, 당시 나의 마음도 삶을 침범하는 것들에 취약했다. 나를 괴롭힐 것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내게 모질었다. 어떤 경로로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우울의 친구로는 외로움과 동시에 무기력이 있다. 무기력해서 무력할 수밖에 없던 날들을 지났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공은 성공을 통해 잉태된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외롭고 무기력한 나는 극복의 경험이 없었고 그러니 나아질 거란 희망을 갖기 어려웠다. 그러니 다시, 침울하기만 할 수 있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러다 지난 주말 한 약속 장소에서, 많이 안정돼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안정감 있게 살이 쪄서 그럴 것이라고 웃어 답했지만, 기분이 내심 좋았다. 슬픔 안에서 더한 슬픔과 덜한 슬픔을 기어코 가려대던 나는, 이제 슬픈 날과 슬프지 않은 날을 구분하는 사치를 가끔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간의 침울함이 극복된 건 아니나, 견뎌는 졌다. 참 못나게도 수동적으로 생긴 '견뎌는 졌다'인데, 견뎌냈다는 표현을 쓰는 건 그때 바스러지게 나약했던 나에 대한 기만이다. 모든 견딤이 능동의 발로일 수 없었다. 우울의 친구인 무기력 덕에 그저 시간만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무엇도 하지 않음으로써라도 삶은 버텨졌고 감당되어졌다. 다행이다. 힘겹게 견뎌진 세상에 축복만 있을 순 없다. 그 시간을 어떻게든 감당하여 여기에 오기까지의 내가 기특해 죽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가는 시간에 저항만 하고 있지 않아도 돼서, 그 덕에 덜 슬플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이다. 지난날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일들에 후회가 컸다. <라라랜드>의 주인공도 아닌 주제에 '만약'이라는 질문을 자꾸 던졌다. 상상은 현실 안에서조차 재생될 수 없었다. 되려 질문은 아프게 스스로를 찌를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덧 과거를 덜 떠올리게 되었다. 아픈 과거의 통증을 이관받아 다시 나를 힘들게 하기보다는, 그냥 아팠던 시간으로 두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아픔은 아픔이다. 아픔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픔이다. 아픔과 성장에는 과학적 인과관계가 없다. 아픔이 성장의 자양분이라는 건 주술적 희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난 아픔이 지금까지도 통증이 여전할 필요도 없다. 삶을 견디며 배운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거의 평생을 무엇이든 해내야 하는 삶을 오래도록 살아왔다. 그게 가혹한 틀이 되어 나를 아프게 했다. 가끔 누군가가 무책임하게 말하고는 하는, 그냥 존재로도 괜찮고 무엇도 안 해도 된다는 류의 발언들이 여전히 꽤나 아니꼽지만, 배울 게 아예 없는 사고방식은 아니다. 최소한 삶의 다양한 형태를 인정하는 문장들이기도 하니까. 개인적으로는 아파도 괜찮다기보다는 안 아프지 않아도 그리 큰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는 영웅담적 허세 섞인 사려 없음과는 어떻게든 거리를 두고 싶지만, 사람이 늘 굳이 강할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이 지독하게 움츠렸던 나를 얼마간 편안하게 해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탯줄을 자르면서부터 강함의 소명을 부여받은 것도 아닐 텐데, 왜 늘 삶을 혁신하고 개척해야 하는지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아프지 않으면 좋지만, 안 아프기만 하지 않아도 때론 살아지는 삶이었다. 삶의 그래도 괜찮은 구석 하나는 어쨌든 나를 기다려주기는 한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도 무엇도 다 나를 떠나도, 그래도 나만큼은 내 옆에 있어줄 수 있다는 게 생의 지극히 당연하면서 어쩌면 유일하게 정겨운 구석이다. 침울해 있던 나를 일으켜준 건, '일어나'라는 정언명령이 아니라 그럼 좀 계속해서 울어도 된다며 생이 무심히 건넨 고마운 방치였다. 내가 나를 재촉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어쩌면 나의 침울함이 조금씩 걷혔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기후 변화는 기상청의 차트처럼 엄밀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정말 모처럼만의 따뜻함이 그날 내 마음 안에서 감지됐을 거라 추측한다.
그러면서 '응원'에 대해 조금 고민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고, 해내야 한다고, 그러니 힘을 내라는 주입이 진정한 응원은 아닐 테다. 어떤 좋은 응원은 내가 내게 그랬듯 방치나 무시일 수 있다. 그 사람이 스스로를 찌르거나 완전히 모든 걸 놓아버리지만 않는다면 지켜만 보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소중한 누군가를 옆에서 바라본 경험이 있다면, 되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알 테다. 당장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고 해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누르는 게 절대 쉽지 않다. 소중한 사이일 수로 더욱 그렇다. 자식의 걸음마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면서도 그 넘어짐이 우려되어 한 순간도 떨어지기 힘든 부모의 마음과도 같다. 그러나 넘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 또 모든 넘어짐이 삶을 해치는 건 아니라는 경험이 우리를 안도하고 나아가게 한다. 삶을 온전히 이겨내는 건 위인전에 기록되는 몇몇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다. 그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았고, 우리가 이름 아는 인물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린 보통 인생에 패배한다. 물론 진다는 건 열패감과 괴로움을 유발한다. 패배와 몰락 그리고 붕괴의 수많은 순간을 견디며 우리는 살아간다. 패배 안에서 충분히 괴로워해도 되고, 슬퍼해도 되고, 아파해도 된다는 걸, 대신 그로 인해 너무 무너지려고 할 때는 다치지 않게 지켜주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어쩌면 가장 어렵지만 소중한 응원과 위로가 아닐까 싶다. 침울해도 괜찮다, 가 아니라 침울하지 않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불필요한 이중부정이 어쩌면 위로의 본질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침울함에서는 한 걸음 나왔지만 세상이 마냥 쉬울 리 없다. 다만, 쉬운 세상은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다. 때론 침울하며 때론 조금 즐거워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회고하며 느꼈던 볼품없는 가르침이 너무 쉽게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여전히 나는 모자라 남을 위로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니, 최소한 나 자신에게라도 슬퍼하지 않지 않더라도 괜찮고, 때론 침울함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해도 견디기만 하면 된다는 다독임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기를 소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