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계의 조연을 자처한 사람들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 리뷰 아닌 에세이

by 사랑의 천문학

*윤가은 감독의 신작 영화 <세계의 주인>과 관련된 내용이 어쩔 수 없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지 않았거나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아래 글은 나중에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영화 <세계의 주인> 예고편 중

살면서 죽지 않을 만큼만의 고통을 받는다는 말은, 죽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린 어쩌면 다들 상처 생존자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떨 때는 상처가 무례함을 거두며 지나가는 호의를 보이기도 어떨 때는 우리 스스로가 상처를 이겨내기도 했겠지만, 상처에도 살아있다는 말은 상처로부터 살아남았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상처와 상처받은 사람다움, 정나미 떨어지는 세상과 그럼에도 붙잡을 희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의 주인공인 '주인'은 스스로의 삶으로 관습화된 통념에 물음표를 던진다. 주인은 상처를 때론 잊고 때론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 중 감정적인 진폭이 가장 크게 울렸던 세차장 장면에서, 주인은 자신의 엄마를 다그치듯 원망한다. 마치 이런 참담한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는 듯, 주인의 엄마는 익숙함과 다정함 사이의 온도로 주인을 지켜보고 달랜다. 상처는 개인의 것이지만 그 통증의 여진은 주위에도 전달되고 균열을 일으킨다. 주인과, 주인의 엄마, 동생, 아빠의 세계는 완전함을 잃었지만 각자의 견뎌짐으로 가까스로 지켜지는 중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상처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주인을 포함한 각자 세계 주인들의 세계는 동시에 꾸려나가고도 있다. 느슨하기도 강하기도 한 연대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보듬는 것 또한 잊히지 않았다. 영화는 두 시간 정도에서 마무리 됐지만, 어딘가의 주인은 저 지난한 싸움을 이후에도 계속하고 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때론 세차장에서와 같은 순간이 다시 찾아오겠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처럼 그 전투들이 너무 외롭지만은 않기를 바랐다.


순간적으로 주인이 통제를 잃은 듯 매섭게 엄마를 다그치던 장면에서, 나는 다소간의 아찔함을 느꼈다. 지난 내 모습이 떠올라서다. 우울을 견디다 못해 가족에게 모가 났던, 정확히 말하자면 가족에게 특히 더 모질었던 기억이 내게도 있었다. 가족에 대해서 가족 구성원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안다. 최소한 나는 영악하게 현명했다. 어떤 모진 언어가 그들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할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울함으로 한없이 괴로웠을 때 나는 내 세계를 망쳐버린 누군가를 탓해야만 했다. 탓은 탓을 부른다. 불똥은 가족에게도 튀었다. 미안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나를 쏟아내는 것이 가족 전체를 괴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면서도, 나는 못나게도 그래야만 했다. 어떨 때 부모는 함께 소리를 질렀고, 어떨 때는 어쩔 줄도 몰라 당황하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나를 말없이 안아주며 진정시키기도 했다. 나 역시 주인과 같이, 그때 나를 좀 더 헤아려주지, 와 같은 서운함과 원망의 말들을 뱉어내곤 했다.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당시 나의 무너짐이 그들의 잘못만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가족이란 참 지랄 맞은 관계다. 그럼에도 부모는 내게 미안해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다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었다. 우울이 나를 강하게 묶어댔던 시절은 내게 있어 위악의 계절이기도 했다. 나의 상처를 남들에게까지 전이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좀 알아달라고, 좀 더 안아달라고, 조금만 더 위로해 달라는 말이, 마음의 번역을 거치면 뾰족하게만 발화되었다. 나의 우울이었지만, 우린 그 괴물을 함께 견뎠다.


어두웠던 시간이 있었고 이제 우린 그때보다 많이 회복했다. 더는 아플 일은 없을 거라 단정 짓지 못하지만, 구태여 그들의 마음에 악의적으로 생채기를 남기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각자의 위치에서 죽을힘을 다하여 삶을 말없이 견뎌왔고, 아주 오랜 싸움을 해온 결과다. 한 순간에 모든 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의 위악은 기약 없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고, 세계를 유지한다는 것만큼 위태로운 일이 없어 보였다. 우울에 대한 착각은, 그 사람이 우울하기만 할 것이라는 몰이해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 생각해 보면 기분이 너무 좋진 않아도 어떻게든 살아는 냈다. 때론 웃기도 했다. 너무 웃다가, 좀 살만하다, 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우울을 야기한 상처와 조금이라도 스칠 때, 나는 겁을 먹었고 힘없이 쌓아온 감정의 장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마치 영화 <세계의 주인> 속, 별일 없고 명랑하며 속 없어 보이는 모습이 나의 일상에도 있었고, 그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 순간도 자주 찾아왔다. 그래도 우리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세계마저 완전히 몰락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우리 사이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부모에게는 이 가정을 지키겠다는 책임감이 나에 비해서는 훨씬 더 강했던 건 맞았다. 참고, 견디고, 받아내고, 지켜보며 부모는 나와 나의 우울을 버텼다. 지금 와서 느끼지만 많은 말들을 삼키며 내게 시간을 줄 때 그들 마음의 미어짐이 내게도 괴롭고 안쓰럽다. 세계를 지키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다행히 나의 나아짐과 접점을 이루는 순간들이 조금씩 많아졌다. 회복은 고통스럽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영화 <세계의 주인>은, 영화 속 '주인'과 동일한 상처를 겪은 이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응원이 아니다. 매몰되어 버린 곳을 조심스레 복구하면서 상처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며, 되려 그 어떤 상처가 있는 이들도 이 영화를 통해 뭉클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밝게 잘 컸다"는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씁쓸한 뿌듯함이었다. 내가 견뎌 온 날들이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고, 견뎌 온 시간이 조금도 티 나지 않기 위해 기울였던 많은 노력들이 처연했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상처만 골똘히 응시하며 살기에, 살아야 하는 세계는 너무 버겁고 바쁠 때가 많다. 나 역시도 현실의 과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느라 때론 내가 겪은 상처를 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비슷한 무언가를 볼 때 나는 많이 위축되고 심장이 크게 뛰며 때론 정서적으로 무너져 그저 미친 듯이 운 적도 있었다. 상처는 조금 옅어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도 어쨌든 멀쩡한 사회 구성원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때론 인위적이기도 하고 때론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그 노력이, 아마 "밝게 잘 컸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결국 '층위'의 문제다. 우울하다고 하여 매 순간 죽을 듯이 우울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우울을 숨기기 위해 애쓴다지만 그게 언제나 연기인 것도 아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존재가 사람이고, 그러다 다시 무너질 수 있지만 또 그 무너짐을 견디는 게 바로 우리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처럼 우린 각자 세계의 주인이지만, 되려 현실에서는 이 세계의 객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린 상처 앞에서 하루씩 고작 이 만큼만 더 견뎌내려고 애쓰는 이들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주인의식이란 그보다 더 거창할 필요는 없다.


한 개인은 상처를 겪고, 그 개인을 둘러싼 세계는 나름의 방식으로 개인을 보듬는다. 다른 영화 <메탈 헤드>에서는, 오빠를 잃은 딸의 방황을 지켜보고 타이르다가, 마침내 딸이 즐겨 듣는 헤비록 음악을 나이 든 부모가 함께 들으며 딸의 상실감과 시선을 맞추기도 했다. 우리 집의 경우에도 아들의 간헐적인 폭음, 모진 말들, 급작스러운 선택들을 인내하고 바라봐주기도 했다. 이제 와 느끼는 사실은 아마도 내게 건네지지 않은 침묵의 언어들이 더 많을 거라는 것이고, 그 한숨과 안타까움의 절절함이 가끔 사무치기도 한다. 나 자신의 비극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에도 너무 큰 아픔이 되었다. 우리라는 세계는, 병들고 쇠약해지면서도 다행히 무너지지 않았다. 나라는 모난 존재가, 마치 영화 <세계의 주인> 속 태권도장 벽의 그을린 부분처럼 그냥 온전히 받아들여졌다. 그러기까지 말 못 했을 고민과 눈물이 많았을 테다. 그럴 줄 모르고 그랬냐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어떻게 큰 상처를 줄 수 있을지 너무 잘 알았다. 변명하자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 속을 태워내다가 게워지는 것들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추악한 토사물들을 수습하며 나를 강하게 안아주었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진심으로 미안하다. 비겁하게 지면으로 전하지만, 그저 진심으로 미안하다. 영화 <세계의 주인> 속 주인이 '미안해'라고 말하면서도 감정을 뱉어냈던 것처럼,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뿐이다. 그럼에도 내 세계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사라지거나 부서져버리지 않게 온몸으로 붕괴를 감당해 주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덕분에, 정말 그 덕분에, 우울이 조금 가셨을 때 지친 마음이 거처할 집이 있었다.


이제 누군가 나에 대해 물었을 때, 많이 괜찮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늘 하는 얘기지만, 나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운이 좋게 상처로부터 생존했을 뿐이라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세계를 지켜주려는 누군가의 헌신이 없었다면, 어쩌면 나는 생존하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 내 세계의 주인인 나를 지키기 위해, 그들 세계에서의 주인공 역할을 잠시 멈추고 내 세계의 조연을 자처한 고마운 이들이 많다. 다정한 이들의 눈물 나는 노력을 잊지 않는 게, 이제는 나의 중요한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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