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있는 세상이, 제가 희망하는 세계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완전히 잃고 싶지 않은 것, 희망

by 사랑의 천문학

크고 작은 실패의 누적은 절망을 잉태한다. 절망은 '절'은, '절연'의 그것처럼 '끊어낸다'는 의미라고 한다. 바람을 끊어내는 게 절망이니, 절망을 희망의 박탈이라 바라봐도 틀리지는 않을 테다.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추억과 희망이라고 믿는다. 절망은 그중 중요한 한 축을 앗아가는 잔인한 행위다. 흔히 쓰이는 용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풀이가 새삼스럽게 비정할 때가 있다. 절망도 그렇게 아프다. 깊이 절망했던 날들은 더 이상의 바람을 품지 않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조금 구체적인 단어로는 이를 '무망감'이라고 칭하는 걸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나아질 게 그리 많지 않다고 믿는 슬픈 버릇은 지금도 어느 정도 진행 중이다. 그러다 최근 한 친구와 이야기하며 깊이 공감했던 한 마디가 있었다. 우리는 피터팬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시간 한 장소에 영원히 귀속되기만 할 수는 없는 존재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게 변하며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 굳이 새로운 내일을 준비해야 할지 물어본 나의 철없는 질문에서 이어진 결론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피터팬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끊어진 바람의 다리를 다시 이어 붙이며 다음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건 우리가 너무 내일을 위해서만 복무해야 하는 서글픈 팔자를 타고난 게 아니라, 그나마 내일을 현명히 준비할 수 있는 종족인 것에 귀인한 진실이다.


나는 앞으로의 삶이 지금보다 드라마틱하게 나아질 수 있을 거라 믿지 않는다. 이 믿음은 꽤나 견고하다. 하지만 최근의 시간은 그날들이 지금보다 '조금도' 나아질 수 없진 않다는 걸 증명한 기간이었다. 힘들지만 삶은 조금씩 조금씩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고 심지어 바람 섞인 가능성이지만, 그리고 언제든 세상이 지금보다도 내게 모질어질 수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삶이 '나아질 수도' 있다고는 믿는다. 미약하지만 소중한 희망이다. 다만, 희망에 대해 말할 때 중요한 건 거창함보다는 존재 여부 그 자체다. 희망이 있어야 사람은 비로소 '살만하다.' 살만하다는 건, 그리고 부러 살아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지 않는 건, 철학적 정교함이나 피곤함을 떠나 한 사람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필수 조건이다. 결코 괜찮아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있었으나, 어찌 됐든 조금이라도 괜찮아지기는 했음을 체감했다. 희망의 근거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 희망이 있기를 희망한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건,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게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말이다"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이 있다. '앞으로'와 '지난 시간' 사이에 굳이 '지금'을 넣자면, '우리가 견디고 살아내는 현재가 바닥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희망을 정의하고 싶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주관의 영역이지만, 측정 불가한 미량의 희망이라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우리는 피터팬이 아니고 우리에게 네버랜드란 없다. 여전한 아이로 살 수 있는 세상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린 각자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동안 무수한 변화를 겪으며 자라고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낙원은 없다. 대부분의 동화들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급하게 마무리하는 이유가 다 있다. 그저 '행복만' 한 삶을 그려낼 재간은 그 어떤 위대한 동화작가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 다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불행하거나 불행이 덜한 시간이 다시 찾아온다. 삶은 이 지리멸렬한 사이클의 반복이다. 행복은 짧고 불행은 깊으며 불행하지 않음은 그래서 가치 있다. 절망은 불행이다. 절망의 날들은 당연하게도 불행한 시간이다. 불행이 깊어지면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이 망각된다. 반복된 불행은 결국 삶은 이 꼴일 수밖에 없다는 체념과 단념으로 이어진다. 희망을 단념할 때 찾아오는 건 지옥이다. 지옥이 괴로운 이유는 거기서 벌어지는 형언하지 못할 형벌들 때문이 아니다. 그 형기가 정해져 있지 않고 언제까지 그 고통을 겪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탈출의 가능성에 대한 소거야 말로 지옥이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벌이다. 희망의 포기가 야기하는 지옥도 비슷하다. 삶이 지옥으로 변한다는 건 언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고 지금을 충실히 견딜 이유가 스스로에게 전혀 없어 보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좋은 세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세상이야말로 좋은 세상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희망하는 세계는 있다. 희망이 있는 세계다. 그러니까 나는 모든 게 괜찮기만 하며 매 순간 즐겁고 벅찬 시간을 꿈꾸지 않는다. 그런 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시간을 차례로 여행할 내가 당도하는 곳들에 희망이 없진 않기를 바란다. 그곳이 누추할 수 있다. 때로는 내가 미천해질 수 있다. 비참함만 삶을 압도하고 뒤덮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래도 어떤 순간에도 '지금 이 순간이 바닥이 아니다'라는 믿음, 즉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희망이 끊어질 때 삶이 절단되는 것 같았다. 그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삶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으니 이제는 다정하고 친절한 세상만이 나를 반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 세상의 굴러감은 그런 소망과는 대체로 무관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혹시나 나를 배반한 세상에 희망이라도 있다면, 그 세상을 좋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해도 '괜찮다' 정도로는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좋고 나쁘고 또 괜찮은 게 있다. 비겁한 회색 지대가 아니라, 그런대로의 시간들에 대한 예찬이다. 행복이 있고 불행이 있고 불행하지 않은 게 있는 것처럼, 괜찮은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린 편하고 안온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이 끊어져 모든 바람을 포기하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피터팬이 아니라 계속 어딘가로 여행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꼭 하나 잊지 않고 싶은 바람이다.


아무튼 시간은 흐를 테고, 나는 그 안에서 삶을 견디고 버틸 것이다. 그러다가 오직 매몰참만 가득한 세계에 도달하더라도, 그게 버틸만한 가치가 있다는 이유를 발견해내고 싶다.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만으로 희망을 지킬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희망은 잃겠다고 잃는 게 아니긴 하다. 그러니 행운이 어느 정도 함께 해야 최악이라 생각되는 순간에도 무언가를 희망할 수 있다. 그게 부디 '불행하지 않음' 정도라도 돼서, 괜찮은 시간을 그런대로 꾸려나갈 수 있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희망이 메마르지 않은 세계를, 소박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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