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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Feb 05. 2023

괜찮지 않고, 멀쩡하지 못해요

    행여라도 들킬까 싶어 마음 안 꽁꽁 숨겨둔 어떤 일기장이 있다. 조금은 아린 마음으로 쓴 이야기. 책상 위에도 침대 옆 서랍에도 없는 이 일기장은, 아마 누구도 영원히 발견할 수 없을 테다. 저자도 독자도 오직 나 하나뿐인 특별한 일기장이다. 오래전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받기 위해 일기를 참 열심히 쓰던 아주 어린 날도 있었다. 이젠 그런 도장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대부분의 글쓰기가 그렇듯, 즐거운 날에는 마음 안 일기장을 잘 꺼내보지를 않는다. 주로 우울과 포기의 순간에 일기장을 펼치고는 한다. 힘들다고 또 괴롭다고. 내게 남은 빈약한 가능성이 아무래도 정말로 너무 손톱만큼 빈약한 희망인 것 같다고. 어떠한 미래도 선명히 그려지지 않는다고. 그런 못난 이야기들로 일기장이 빼곡히 채워지고, 나는 그렇게 괜찮지만은 않은 나를 골똘히 응시한다. 누군가가 내 일기장을 어떤 경로로든 획득하여,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아픔이 한낱 흥미로운 가십거리로 소비될까봐 조금 두렵다. 그래서 일기장을 마음속 더 깊이 감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 모순적이게도 그런 욕심은 또 있다. 내가 먼저 내 일기장을 펼치지 않아도 혹은 굳이 그 일기장을 읽어주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 '괜찮니?'라고 물어보는 이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떻게 보면 참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욕심에 가까운 마음이기도 하다. 사람이 말을 해야 알지, 표현을 하고 티를 내야 상대방도 당연히 그제야 알지. 번거롭고 용기가 필요한 것은 감당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로 누군가의 관심을 바라는 것 아닌가. 조금은 비겁하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런 침묵은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하다. 아무 말도 없이 위로와 위안을 바라는 것이 그래서 조금은 너무한 마음인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먼저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심은 어쩔 수 없다. 모든 걸 시시콜콜히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다. 타인에 대한 그런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마냥 쉬운 시대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자기 한 명의 삶을 힘겹게 준비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도 이미 충분히 인생이 버거울 것이다. 그들만이 느끼는 각각 다른 고통과 아픔들도 있을 테다. 사람들은 어차피 자신만의 짐을 지고 살아가니까. 누구도 그 짐을 나누거나 바꿀 수는 없다. 삶의 여로에서 각자의 희망과 절망으로 우린 한 걸음의 발걸음을 묵묵히 내딛는다. 나 역시 내 몫의 삶을 감당하는 중이다. 그러나 가끔은 일상적인 호흡조차 벅찰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의 위로가 조금은 절실하다. 말해주지 않아도 먼저 알아채고 품을 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철없는 생각도 든다. 아직 덜 자랐나 보다.


    겉으로는 다친 곳도 없고 아픈 곳도 없는, 말하자면 지극히도 '멀쩡한' 나날들이다. 생의 가능성이 아직 완전히 닫히거나 소진되지는 않았고, 그래서 다행히도 아직은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할 수 없는 것들보다는 더 많다. 일관되거나 나란히 정렬되지는 못했던 지난 걸음들이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걸어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다 조금씩은 아픈 마음을 안고 삶을 살아낸다. 그러니 내가 유난을 떨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 안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 아프면 안 되는데, 종종 괴롭다. 무너지면 안 되는데, 그만 풀썩 주저앉아버리고는 한다. 버겁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삶을 감당한다는 게 참 쉽지 않다. 삶에는 습작이 없어 상처 난 부위에 덕지덕지 물감을 뿌려 어떻게든 다시 살아내야 하는 게 인생이지만, 그런 과정에서 가려진 상처가 조금씩 덧나 더 큰 고통으로 내게 다가온다. 사람이 이런저런 힘든 일을 겪고 불행한 얼굴로라도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건, 비단 자존감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월의 굳은살이 사람들을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머무를 수 있게 돕고는 한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과거의 어떤 일들에도 죽지 않고 버텼던 경험 덕에, 아주 힘겹게 얻어낸 굳은살이다. 썩 두껍지는 않은 그 굳은살을 얻기 위해, 쉽지만은 않은 날들을 애써 견뎌야 한다는 건 조금은 부조리하고 불공평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이기도 하다. 마음 안에 굳은살이 단단히 형성되지 않아서인지, 나는 아직 삶이 조금은 아프다.


    근 두 달 동안 꽤 많이 바빴었다. 육체적인 바쁨 덕에 내 마음을 살피는 일에는 조금 소홀했다. 한 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조금은 생각을 환기하고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긴 이제야 오랜만에 마음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역시 오늘 오랜만에 꺼낸 내 마음 안 일기장에는 불안과 초조함이 적혔다. 또 한 번 아프게 쓴 일기였다. 이 일기 역시 다른 누구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일기장을 다시 마음 안에 꽁꽁 숨기고, 나는 또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과 몸짓으로 다가올 내일을 살 것이다. 어떻게든 덜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나는 괜찮다. 물리적으로는 정말로 충분히 괜찮다. 어쩌면 아픈 마음에만 신경을 쓸 수 있는 것도, 겉으로는 멀쩡하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제대로 지탱되지 못하는 위태로운 내 마음을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조금은, 펑펑 울고 싶기도 하다. 그냥 눈물을 마음껏 낭비하며 소모하고 싶다. 그럼 좀 숨통이 트일까 싶은 마음이다. 눈물조차 안 나오는 하루를 어찌어찌 보냈고, 또 그렇게 어떻게든 다음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그동안 계속 그래왔으니까, 해낼 수 있겠지.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 '정말 괜찮니?'라고 물으면, '사실은 괜찮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예전부터 계속 괜찮지가 않다'라고 말하며 얼굴을 감싸고 무너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면서도, 누군가 한 명은 꼭 알아주고 안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 아픈 모순이 담긴 일기장을, 늘 그랬듯, 다시 이렇게 덮고 마음 안 깊이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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