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을 만약으로 애도하기(영화 <만약에 우리>)

그때 우리가 잘 했다고 말 할 수 있어, 참 다행이야

by 사랑의 천문학
그때 우리가 잘 했다고 말 할 수 있어, 참 다행이야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란, 좋게 말해서 진부하고 안 좋게 말해서 겨우 견딜만하게 지루하다. 말 그대로,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덕분에 순간의 희열을 위해 사표를 제출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투자 소득이 있어야 멋지게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근로 소득마저 없으면 삶의 지속가능성은 담보되기 어렵다. 지루함을 감내해야 삶의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감내해야 할 게 지루함만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지점이다. 삶이 지루한 건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을 걸 알기 때문이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들을 무탈히 보내다가 숙면을 기원하며 잠들고, 그럼에도 뒤척여버린 언짢음을 이겨내며 일어나는 보잘것없는 날들의 집합체가, 나의 요즘 생이다. 30대가 되며 삶은 더 별 볼 일 없어졌다. 나쁘거나, 나쁨까지는 다행히 모면한 정도의 하루들이다. 혹시 모른다. 지금부터 도를 닦든 신내림을 받든 어떤 이유에서든 사표를 쓰면 굉장히 감정적으로 널뛰는 시간을 선물 받을 수는 있다. 그래서 삶을 지겨움 속에 처박은 이 울타리가, 솔직히 고마울 때가 많다. 생이 천방지축이 되는 걸 막아주는 진부함이기도 하다. 인생이 지루하다는 건 최소한 안전은 하다는 의미다. 불안하면 지겨울 틈도 없다. 초라해질 때는 있어도 숨 막힐 듯 초조한 순간은 적다. 심정적으로 청춘의 시간과 작별할 준비는 아직 안 됐기는 하다. 그러나 벌써 언뜻 희미하게 보이는 중년의 날들이다. 나는 피터팬이 아니다. 삶의 다음 단계는 어느새 이렇게 도래하고 있다.


별 다를 것 없는 별 볼 일 없는 날들의 연속을 항해하는 건, 지겹고 지루하지만 숭고한 일이다. 삶은 능동보다는 수동태에 가깝다. 되겠다고 한 것에 다다랐다기보다는 되어버렸다고 표현하는 게 더욱 적확하다. 어떻게든 주어진 자리에서 하루를 견디고 버티는 중이다. 멋지진 않을 수 있지만, 멋있음이 유의미함과 동의어는 아니다. 이제 생의 의미를 잘 이겨내는 것에서 찾는 중이다. 그리 변동의 여지가 많지 않고, 그렇게 어느 정도 예측이 되는 삶의 단계에 도달했다. 거창한 꿈은 가끔 꿀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거창함마저도 계산의 과정이 터무니없진 않은 선에 위치하게 된다. 영화 <라라랜드>의 후반부 오디션 장면에서, 주인공은 센 강에 맨발로 빠졌던 자신의 이모 이야기를 통해 미침은 어쩌면 삶을 채색하는 도료라는 노래를 아름답게 불렀다. 그게 예찬받을 시기가 있다. 하지만 갑자기 지금 이 나이에 미치면, 진짜 미친 거다. 미쳐도 곱게 미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회복은 가능하게 미쳐야 한다. 생이 우리에게 너그러울 때가 없지는 않다. 다만 그 호의가 영원할 거라 믿어서는 안 된다. 실수와 어긋남이 어느 정도의 따스한 교훈을 남긴 채 용서받을 수 있는 날들은 그리 많지 않다. 세상이 진부하게 느껴진다는 건, 어떻게 보면 삶이 흑백이란 말이기도 하다. 생기 있던 어린 날엔 확실히 앞 뒤 재지 않는 '미침'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날들이 예뻤든 못났든, 예뻤고 못났던 시절로 어떻게든 묻어두고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게 나의 책무다. 미침이 없으니 번뜩임도 없지만, 그런대로 성실하려고 애를 쓰는 노력의 잔잔함은 있다. 어쩌면 이게, 내가 앞으로 천착해야 할 무언가다.

영화 <만약에 우리>에서도 사랑하던 과거는 채색되어, 사랑이 끝난 현재는 흑백으로 표현된다. 주인공 은호와 정원은 서로에게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심장도 떼 줄' 수 있을 정도로 미쳐있던 두 사람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들 역시 피터팬은 아니었다. 세상에 그대로이기만 한 것은 없다. 그대로일 수 없는 세상은 그대로일 것 같았던 '우리'도 변하게 만든다. 그 시간 그 공간에 있었기에 둘은 '우리'가 됐을 것이다. 그때와 그곳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딘가다.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색이 바랬을 테다. 비참함만이 삶의 진실인 순간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온다. 더 빛났던 지난날과의 대비는 현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그리 큰 잘못을 하지 않았더라도 초라함은 스스로를 미천하게 여기도록 작용한다. 미천한 자신에게 사랑은 짐이다. 더 멋진 무언가가 있을 수 있음을 안다는 건 가능성의 축복이 아니라 굴레의 저주다. 자격지심은 스스로를 할퀴고, 할퀴어진 상처에 사랑의 온기는 따갑게만 느껴질 뿐이다. 누군가가 떠났고, 누군가는 남겨졌다. 누군가는 용기를 기다렸으나, 누군가는 한 발 물러날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잘잘못을 따지기는 어렵다. 잔인하지만, 그렇게 된 거다. 뒤늦게서야 인과관계가 보이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 시절엔 죽어도 몰랐던 것들이다. 그 시절에 죽어도 몰랐을 걸 왜 그때는 바보였냐고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채점이 완료된 뒤에 못 푼 문제의 방정식을 떠올리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세상 어딘가에 색이 바래고 바랜 푸석한 빛깔의 옛 연인 한 쌍이 존재했던 것뿐이다.


떠남과 남겨짐 이후, 둘은 '잘 될 거야'라며 서로에게 응원했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각자의 노력을 기울이고 살았다. 그러면서 서로의 삶은 어느새 흑백의 세계로 진입했을 것이다. 흑백의 세계란 별일 없을 세상이다. 말하자면 나의 나쁘거나 나쁨만은 모면한 날들과 비슷하다. 각자가 도착한 삶의 자리에서 그들대로의 최선으로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모자란 것에 아쉬워하고 가끔의 여유에 웃기도 하며 삶은 흘렀을 테다. 우연 같은 재회는 삶이 마련해 준 용서의 시간이었다. 용서의 대상은, 결국은 스스로였다. 다 못 푼 시험지를 왜 걷어갔는지에 대한 원망과 이제는 아는 그 답을 왜 당시에 써내지 못했냐는 책망을 서로에게 풀어낼 시기는 이미 충분히 지난 후 그들이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왜 떠났는지 묻지 않았고, 왜 한 발 물러섰는지 따지지 않았다. 이젠 알았기 때문이다. 제 멋대로 흐르는 시간과 세상에 바랠 수밖에 없는 색이 있다는 걸. 그러나 그 바래짐은 특정한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모자랐던 젊은 청춘들이 서로를 충분히 보듬을 여력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초라함에 매몰되어 미처 지켜내지 못한 것들의 상징이 그들의 절실했던 찬란함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실패하고는 하는 일에 그들 역시 실패했을 뿐이었고, 이젠 그들도 대단한 걸 해내지 못했다는 게 지난 서로를 힐난할 사유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전하는 대신, 두 사람은 흑백의 세상 속에서 '만약에'라는 구절로 지켜내고 싶었던 세계에서 잠시 마음을 맞추었다. 아프긴 했지만 헛된 젊음을 보내지는 않았다는 위로가 조금 늦게나마 스스로를 용서하는 데 아낌없이 사용되기를 바랐다.


영화 말미에 드디어 현재에도 채색이 되었다. 지리멸렬한 후회로만 점철됐던 지난 시간을 이제야 긍정한 그들에게 생이 선사한 선물이지 않았을까. 흑백의 현재는 달라질 게 많지 않아 분명 진부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시시각각 색상이 변하는 세상에 머무를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며 경험이 쌓이고 자연스레 삶의 오답은 축적된다. 비단 사랑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여러 오답들 중 유독 아쉬웠던 것들에 '만약에'라는 물음을 품어보는 건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다. 그리 변할 게 많지 않아 안정된 세상에 이른 우리에게는, 다시 한번 중요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애도'다. 지난날은, 아무리 잘 쳐줘도 바보 같았던 시간이다. 과격하게 말하면 '멍청'하기도 했다. 지금의 지식이 있었다면 그때의 어려움을 수월히 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때의 바보 같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안정이 존재한다. 삶에 필요한 소질을 어느덧 갖추게 되는 건, 인정하기 싫지만 수없는 실수와 실패들의 축적 덕분이기도 하다. 지금의 능숙함은 그때 무언가를 잃었기에 가능하고, 그러니 상실 이전으로 돌아가더라도 현명히 삶을 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태생적으로 모자란 구석을 타고난 우리들의 부족함이 실수를, 아쉬움을, 미련을, 그래서 '만약에'라는 질문을 잉태한다. 다만 그리 부질없기만 한 구절은 아니다. '만약에'에 기대어 지난 멍청했음이 이뤄낸 지금을 긍정하고, 그러면서 다시 초라했던 옛날의 스스로의 등을 어루만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간절했던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화해하고 변론하는 애도의 과정을 겪으며 비로소 조금 더 삶의 다음 단계로 발을 디딜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뻔한 흑백 같은 삶은, 인생에 별 일 같은 게 생기리라 믿지 않게 된 이들 대부분의 일상이다. 영화 <만약에 우리> 속 현재의 은호와 정원의 모습이, 우리의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말은 우리에게도 사랑이든 꿈이든 무엇이든 '만약에'라고 떠올리며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은호와 정원처럼 대단했던 사랑을 그려나갔던 이들도 현실 때문이든 마음 때문이든 소중했던 걸 잃고 실패하는 게 우리 대부분이 공유하는 현실이니, 우리가 우리의 모자랐음을 특별히 미워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어느덧 다다른 삶의 이 시점에서, 우리의 뻔해진 지금을 이루는 게 실은 온갖 감정들로 마음이 요동쳤던 지난 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필요했던 화해와 애도다. 색들은 겹치면 겹칠수록 검정으로 수렴한다. 우리의 흑백은 단순히 뻔하고 지루하고 진부한 시간이 아니다. 소중했고 아팠고 즐거웠던 옛 순간들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낸 단단한 일상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요령이 있다. 모자랐던 지난 시간처럼 초라함과 비참함에 함몰되어 소중한 걸 허무하게 떠나보내지만은 않을 것이다. 삶을 견디고 버텨낼 여력이 그때보다 조금 더 생기기도 했다. 덕분에 이제는 무언가를 지켜내고 품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지난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못난 우리일 것이다. 못났음을 알게 된 우리는 그런 실수를 덜 하려고 애쓸 테다. 소중한 걸 잃으면서 얻게 된 성장통의 소용에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자라긴 자란 우리는 그때처럼 쉽게 무언가를 잃지는 않을 테다. 삶은 이런 식으로 부조리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우리에게는 겨우 쥐게 된 다행스러운 소질인 셈이다.


영화 <만약에 우리> 속 은호는 정원을 원망하지 않았고 정원 역시 은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다만 둘의 시간을 반추하고 애도할 뿐이었다. 여전히 우린 모자란 사람들이겠지만 그래도 그때만큼 모자라진 않을 거란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던 스스로가 내린 지난 시간을 용서하며 못났다고만 비난했던 어렸던 자신과도 화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만약에 우리>의 대사들 중 가장 따뜻했던 말은, 많이 회자되는 "잘 될 거야"가 아니라 "그건 잘 한 선택이었어"였다. 어린 시절의 세상을 채색하는 건 <라라랜드> 속 주인공의 말처럼 '미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의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주는 건, 미쳤지만 모자랐고 초라해서 무너졌던 시간에 대한 따스한 애도와 용서, 그리고 화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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