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남은 빈 집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결국 사람은 이것으로 살아간다'는 명확한 답을 내놓은 사람은 아직껏 없었다. 숱한 대답들이 있었고, 그것들만큼의 숱한 반박들이 있었으며, 그 대답들과 반박들은 아마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이 불멸의 미제 안에 담론의 장을 형성했다. 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물음은 '불능'이 아니라 '부정'에 가깝다. 답이 많아도 너무 많은 것이다. 삶이라는 평면 함수 그래프가 있다면 자신의 x 좌표에 따라 산출되는 y 값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조금 더 멋있게 수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으니 이쯤에서 유식한 척은 그만 하도록 하자. 아무튼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그게 '수학의 정석'은 아닌 듯하다.
2016년에 개봉했던 일본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역시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사고 실험이었다. 이 영화의 흥미로웠던 점은, '살아감'과 '살아짐'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질문을 던졌다는 것에 있었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시한부 주인공에게, 어떤 (자칭) 악마가 찾아와, 세상에서 무언가를 하나씩 없애는 대신 하루씩의 생명을 더 연장해주겠다는 거래를 제안한다. 악마는 전화와 영화, 또 시계 등을 지웠고, 이와 얽힌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는 소멸했으며, 자연스럽게 이들과 나눈 추억들까지 그 결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무엇이 물리적인 호흡과 육체적 활동이란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살아지는 삶'을, '살아감'이란 주체성을 띠게 하는 가란 질문에, 영화는 '추억'이라 답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우린 한 줌 추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메모를 핸드폰에 남기기도 했다. 추억이 소제된 삶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상태로의 '살아있음'에 불과했다. 호흡하고, 걷고, 움직이며, 심지어 말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살아지기만' 하는 삶은 '사라진'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물리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대신 얻어낸 '살아지는' 삶이었기에, 어쩌면 사라짐보다도 못 한 '살아짐'이었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본 후에는, 그래, 추억 좋지, 그 여운과 따스함으로 우리는 생을 살아가는 거야,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추억이 되지 못 한, 그러면서도 망각할 수 없는 기억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 건가 싶었다. 추억은 기억의 부분집합이다. 추억의 여집합에는, 좋은 기억이 아닌데, 그래서 잊고 싶은데, 여전히 망각되지 않고 있는 악질 기억들도 자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한 줌 추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많은 기억이 있어야 '한 줌 추억'이 생산될 수 있는 걸까. 그 한 줌 추억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우린 얼마의 '잊고 싶은' 기억들을 함께 쌓아야 하는 걸까. 부끄럽고, 괴롭고, 그래서 사람을 앓게 하는 기억은, 한 줌 추억의 대가로는 너무 가혹한 것 아닐까. 망각이야말로 인간이란 종이 타고난 최고의 선물이라는데, 그게 뜻대로 또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는 행위는 아니라는 게 참 문제다. 어떤 기억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래서 살고 있는 인생이 '사라짐'과 '살아짐' 이하의 삶이 그 부산물이라면, 그때도 사람을 살게 하는 건 '한 줌 추억'이라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문제는 '추억이 아닌 기억'들이다. 망각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추억'이라 불릴만한 기억들만 갖고 살 수 있다면, 훨씬 좋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하필, 잊겠다고, 잊으려 한다고, 죽어도 잊어버리겠다고 하는 일일 수록, 잊는 게 더욱 지난하다. 무엇인가를 잊겠다는 다짐은, 그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는 사실을 머릿 속에 선언하는 것과 등가의 의미니까. 김광석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도, 결국은 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 아름답든 말든 내 맘 속의 빛나는 별 하나 너를 잊지 못 한다는 거 아닌가. 이쯤에서 우린 가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누가 이 기억만 좀 없애줬으면.
이런 상상력이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유효했는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역시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고른 지지를 이끌어냈다. 다소 감정기복이 심한 기질의 여자 주인공 클레멘타인이, 잦은 다툼으로 이별한 후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지웠다는 걸, 남자 주인공 조엘은 뒤늦게 알게 된다. 상처와 열을 동시에 받은 조엘은, 자신도 기억을 지우는 회사(회사 이름이 하필 또 '라쿠나'사다. '라쿠나'란, 채워지지 않았거나 잃어버린 부분이라는 뜻이다.)로 찾아가서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 아니, 정확히는 지워달라고 했'었'다. 영화의 기억 제거 작업은, 최근의 것들부터 지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마지막의 이별에 가까운 기억일 수록 좋지 않은 것들이 더욱 많을 테니, 점점 조엘의 머릿속에는 클레멘타인과의 소중하고도 따뜻한 시간만이 남게 되었다. 문제는, 조엘이 그녀와 관련된 기억을 전부 지워달라고 한 데 있었다. 서로의 애틋했던 시간들 또한 기억 밖으로 날아가려고 한다. 조엘은 기억 안에서 이것만은 지우지 말아달라고 소리치지만, 그건 오직 기억 안에서의 외침이기에 이미 진행 중인 기억 제거 작업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그는 기억 속의 클레멘타인을 붙잡고 여기저기로 도망을 친다. 두 사람의 사랑이 남긴 '한 줌 추억'을 지켜내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 몬탁의 집으로까지 이른다. 그곳은 클레멘타인과 나눈 모든 추억들의 시발점이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던 두 사람은, 몬탁에서 만나자는 따뜻하고도 애절한 작별의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었고, 기억 속 집은 끝내 붕괴된다.
이 장면 이후에도 중요한 에피소드들이 더 있고, 역시 영화에서의 가장 따뜻한 부분들 중 하나도 그 안에 존재한다. <이터널 선샤인>은 해석될 여지가 참 많은 영화며, 감상할 때마다 조금씩 더 새로운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게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건 크게 두 가지였다. 기억을 지워내고픈, 그래서 되도록이면 아프고 괴로운 기억은 남기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시각화했다는 점이 첫 번 째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어떤 기억의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소멸을 상상해본 적 있을 테다.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그 상상을 스크린 위에 구현해냈다. 두 번 째로 인상적이었던 건, 지워냄의 과정을 통해서 보여준 기억과 망각의 참으로 지랄맞은 속성이다. 그 속성은, 분노와 슬픔 등의 감정이 걷힐 수록 좋았던 기억들이 더욱 빛난다는 것이다. 지워내고 싶은, 또는 어떻게든 털어버리고 싶은 상처 'A'가 있다고 하자. 지금 당장은 상처의 아픔 때문에 이 'A'라는 기억이 그저 밉고, 속상하고, 왜 학교 수업은 듣는 족족 까먹는데 이것만은 이렇게 꽉 붙들고 있는지 너무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래서 가끔은 그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 하여 충동적인 결정들을 내리기도 하며, 때로 그 중에서는 결코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형태의 것들도 존재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억을 지우는 행위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자 상징이라고 이해해도 괜찮을 듯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명해지는 지는 기억은 과연 어떤 것일까. '분노와 괴로움', 혹은 누군가의 표현을 빌려 '원한과 신파'라는 먼지를 모두 걷어낼 만큼의 시간이 흘러 다시 'A'를 바라보면, 아니 세상에나, 그렇게도 애틋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건 '이터널 선샤인', 즉 영원한 햇살과도 같은 따뜻한 기억이다. 하지만 사실 태양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기상 상황에 따라 햇빛의 강도만 달라질 뿐이었다. 그때 심한 먹구름이 잠깐 가려버린 햇살을, 영원한 어둠이라 착각했던 것이다. 어떤 일을 명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감정이 누그러져야, 기억은 제 자리를 찾을 테고, 그제야 미약하게나마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기간이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기에, 언젠가 찾아올 안온한 상태의 날들을 그저 소망하며 견디기에는 상처의 여진이 때로는 너무도 괴롭게 다가온다. 괴로움을 못 이겨 충동적인 행위들로 당시의 탈출구를 찾았건만, 그렇게 함께 나눴던 순간들이 이젠 결코 복원될 수 없는 기억으로 변해 추억조차 못 되게 생겼다. 이 사실이 다른 차원의 고통을, 적확히 말해서는 후회와 회한의 괴로움을 수반한다. 따라서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의 기억이 지워지고, 그러면서 조엘이 자신의 기억의 지워짐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이내 그들의 집이 무너져버리는 장면은, 우리가 A라는 기억의 찬란함과 아름다움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뒤늦게 깨닫고 그렇지만 무엇도 할 수 없는 안쓰러운 무력함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집이 붕괴된다는 것, 여기에 주목했다. 사랑과 건축은, 특히나 많은 작품들에서 서로 유비되곤 했다. 당장 떠올려보면 우선 <건축학 개론>이 있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도 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젊은 날의 아린 사랑의 송가로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기형도 시인의 '빈 집'이란 시도 있으며, 토이의 '거짓말 같은 시간'이란 노래에는 '바보같은 꿈을 꿨어, 우리만의 집을 짓는 꿈을'이란 구절도 등장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두 사람은 주인이 없는 빈 집에 잠입했고, 클레멘타인은 술을 찾으며 무척 즐거워 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에는 클레멘타인을 미쳤다고 생각했던 조엘이었지만, 모든 기억이 지워질 때 쯤, 그는 그날의 클레멘타인은 미쳤었던 게 아니라 그를 만나 '들떠있던' 것이었음을 인지하게 된다. '들떠있음'을 '미침'으로 해석하여 둘은 이별했고, '미침'이 '들떠있음'이라는 걸 이해할 때 비로소 조엘은 절실해졌으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기형도 시인의 '빈 집'은, '가엾은 내 사랑'이 결국 갇혀버린 장소다. 사랑을 잃고, '짧았던 밤들', '겨울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 '흰 종이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그리고 마침내 '내 것이 아닌 열망들'에게 '잘 있거라'란 인사를 건넨 화자는,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빈 집의 문을 잠그었다. 사랑이 끝났으니 더 이상 이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다. 그러니 '빈 집'이다. 하지만 집의 문이 닫긴 것이지, 집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기형도 시인의 사랑은 붕괴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집 안에 고이 '잠겨진' 것이다. 조엘의 기억 속 '부서진 집'과는, 사뭇 다른 온도의 '빈 집'이다.
여기서 다시, <이터널 선샤인>의 후반부로 돌아가 보자. 라쿠나사의 직원 메리는 고객들의 음성이 녹음된 테이프들을 다시 고객들에게 보낸다.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운 채 살아가다 이내 다시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도 각자의 카세트 테이프를 수령한다. 그리고 이 테이프에 담긴, 자신들의 육성으로 내뱉은 상대방에 대한 험담을 함께 듣게 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지겹다고, 또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멍청하다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적나라하게 비방했다. 자신을 향한 험담까지 들은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방을 나가고, 조엘은 그녀를 붙잡는다. 언젠가는 또 다시 이렇게 될 거라며 클레멘타인은 새로운 관계로부터 도망가려 하지만, 조엘은 그 유명한 '오케이'라는 대사를 여기서 클레멘타인에게 건넨다. 두 사람은, 몇 번의 '오케이'를 반복한 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다.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 아니랄까봐, 이 장면 역시도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우선 겉으로는 결국 사랑할 인연은 다시 사랑하게 된다는 단순하고도 따뜻한 결론으로도 보일 수 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냈다고도 보여질 수 있고.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을 '찌질'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별 후, 주위 사람들이나 친구들에게 지난 연인의 흉을 보고, 그나 그녀를 비방했던 경험이, 아마 내게만 있지는 않을 테다. 술을 한 잔 마신다면, 비난의 수위는 때로 북한의 서울불바다 발언 만큼이나 제고되었다. 라쿠나사에서 그들이 서로에게 내뱉은 험담은, 이별 후의 이런 '찌질'한 행동들의 상징이다. 이 행위를 비롯한 '성숙하지 못 함'이 되려 추억의 아름다움을 훼손할 수 있다는 걸, 조엘과 클레멘타인도 그때는 몰랐을 테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각자의 육성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본인들이 직접 다시 듣게 된다. 이는,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가 자신들의 지난 찌질함을 절감하는 순간의 상징이다. 위에서 어떤 일의 명징함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행동이 찌질했음을 선명히 알게 되는 것도 대부분은 유효한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다. 이는 굉장히 부끄럽고도 괴로운 과정이다. 게다가 영화 속 두 사람은, 이 녹음을 한 후에 라쿠나사에서 서로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기억 안에서 철거해버리기까지 했다. 언젠가 큰 후회를 야기할, 이별 후 미성숙함의 자기파괴적인 모습이었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보관될 두 사람의 집은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어렸던 그리고 성숙하지 못했던 이들이었고, 그래서 그렇게나 따뜻했고 열렬했던 추억까지 손상을 입었다. 기억 속의 몬탁에 다다랐을 때, '이젠 어쩌지'라는 클레멘타인의 대사에 '음미하자'라고 조엘은 대답한다. 이렇게 한 시절과 추억을 반추하고 '음미'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들에게는 그럴 기억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조엘의 복도에서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들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오케이'라고 서로 몇 번을 말하는 장면을, 조엘과 클레멘타인 두 사람의 인연이 굉장히나 끈끈했다, 라는 피상적인 이해에서 머무르게 하기에는 다소 아쉽다. 이 장면에는, 찌질하고도 미성숙한 이별을 경험했던 두 사람이 이후 치열한 자기혐오와 자기연민, 그리고 자기반성이라는 극도의 지리멸렬함을 겪은 후, 더욱 성숙한 상태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두 사람의 대사, 특히 클레멘타인의 대사에서, 우리가 힘든 이별 후 겪는 여러 후유증들이 엿보인다. 이를테면, '사랑따윈 다 똑같아', '어차피 다음 사람도 이전처럼 내게 질릴 테고', '그러니 우린 또 헤어질 거야' 등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는 듯한 회의감과 무력감이 특히 그녀의 사고를 지배하는 중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조엘은 '오케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이야기 한다. 클레멘타인은, 그제야 조금 마음의 문을 열며, '오케이?'라고 반문한다. 이들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복기해보자. 너무도 열렬히 사랑했고, 그래서 이별은 열렬했던 사랑만큼이나 너무 아파 차라리 모든 기억마저 지워버리고 싶었으며, 실제로 그 기억을 다 지웠고, 그러다가 다시 만나 사랑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기억을 지우기 직전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고 또 자신들은 사랑의 기억을 얼마나 미성숙하고도 우악스럽게 훼손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각자의 육성에 녹음된 서로를 향한 모진 험담들을 들으며 상대를 괴롭게 하고 스스로도 심한 자괴감을 느낀 건, 어렸던 그래서 어리석었던 지난 이별에 대한 절절한 반성문이었다.
그렇다면 '오케이'라고 말하는 조엘을, 아주 아프고도 찌질했던 이별을 겪은 누군가가 견뎌온 지난 날의 상징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들은 이별의 상처에 고통받았고, 그 아픔을 못 이겨 온갖 찌질한 짓을 했다가(기억을 삭제하는 행위), 이젠 시간이 흘러 그날들의 찬란함을 뒤늦게 알았는데 자신의 찌질했음이 그 추억에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몬탁의 집의 붕괴)를 냈다는 사실로 다시 괴로워한다. 그러니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오케이'에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이런 지리멸렬함으로부터 비롯된 회의가 너무도 괴롭고 컸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어떤 이별의 후유증을 너무도 독하게 겪은 후에는 새로운 사랑에 주저하게 된다. 클레멘타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영화 속 클레멘타인에게 있어 그 모든 아픔의 원인이자 또 총체와도 같던 조엘이, 그녀에게 '오케이'라고 미소지었다. 그건 지난 날의 클레멘타인이 현재의 자신에게 이젠 괜찮다고, 이제는 정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괜찮다고, 그런 못남을 또 반복하지는 않을 거라고 건네는 따스한 위안과 응원이지 않았을까. 자신의 못남으로 찬란했던 지난 사랑의 기억마저 망쳐버렸다고, 그래서 추억마저 망가져버렸다고 자책하던 한 사람이, 지독한 성장통 끝에 사랑에 다시금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의 의미로서의 '오케이'였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나눈 복도에서의 대화는, 어쩌면 이별을 심하게 겪었던 누군가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고 다시금 사랑에 마음이 열리기까지 스스로와 숱하게 나누었을 내적 고민일 수도 있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새로운 사랑이 이전과는 다르게 그저 무탈하고, 언제나 행복하며, 또 영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 사랑도 언젠가는 이별을 마주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매체들이 연애를 다룰 때, 두 사람이 결혼에 성공하지 않으면 '새드'라고 여기는 풍토가 있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헤어짐은 '새드 엔딩'인 걸까. 분명 헤어짐 자체는 슬플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결말 때문에 관계 전체에 '새드'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그 관계가 언젠가 품었던 찬란함과 따뜻함은 너무 아쉽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엔딩을 해피나 새드로 명명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그 찬란한 온기를 추억으로 잘 간직하는 일이다. 기형도 시인의 '빈 집'의 화자가,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간 적은 있는지, 그래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닫았던 문을 다시 열기는 했는지, 이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이 화자에게는, 마음을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 헤어진 지금은 아주 지난해보여도, 그래도 언젠가 만약이라도 다시 '잃어버린 사랑'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면, 조금 용기를 내어 찾아갈 수 있는'빈 집'이다. 누구든 평생토록 건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듯, 사랑에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후회되거나 아픈 시간도 분명 존재한다. 사랑의 매 순간이 그저 예쁘고 아름다울 수는 없다. 분명 후회토록 아픈 순간도 있으며, 게다가 헤어진 후에는, 이딴 연애는 차라리 안 했던 게 몇 배는 더 낫겠다 싶을 수도 있다. 그 고통의 끝에 추억을 훼손해버렸는데,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경우에는 이젠 그게 너무 후회가 되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자기혐오에 가까운 감정으로 과거를 반성한다. 조엘의 집에서 자신에 대한 험담을 듣던 클레멘타인은, 음성 재생을 멈추려는 조엘에게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겠다고 한다. 그건 아마, 아프고 괴로운 기억을, 또 부끄럽기도 했던 이별의 순간을, 정면으로 응시해보겠다는 다짐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심이 있다고 괴로움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기에,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집에서 뛰쳐나왔다. 조엘은 그런 클레멘타인에게 '오케이'를 전했다. 이 '오케이'가, '이제 그만 힘들어해도 돼'라는 의미로 읽혀 더욱 절절했다.
훼손된 추억을 상징하는 '부서진 집' 혹은 '부서진 기억'은, 스스로를 상실해버리는 자기 파괴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조엘의 기억이 무너질 때, 클레멘타인은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어쩌면 그렇게 과거의 기억들 안에서 산출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종족이고, 그래서 결코 지난 기억들과 유리될 수 없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한 사랑이 남긴 상처를 대함에 있어도, 집을 부수듯 이를 억지로 벗어나려 위악과 억지를 부릴 게 아니라, '빈 집'의 문을 잠그듯 조금은 아릿하게, 또 조금은 슬프게 그냥 그 자체로 내버려두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성숙한 행위일 테니 말이다.
세상에 기억을 지울 수 있는 회사가 존재한다는 게 영화의 설정이지만, 나는 두 사람이 영화의 엔딩 이후에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 회사를 찾아가 기억을 몇 번이고 지우며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추론, 혹은 희망해 볼 수 있다. 이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파괴에 가깝도록 기억을 지워가면서까지 추억과 관계에 생채기를 내었던, 그런 모습의 지난 이별을 반복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별이 그들의 새로운 사랑에도 찾아올 수 있겠지만, 이제는 사랑과 추억이라는 집을 철거하고 부수기보다는, 비록 '장님처럼 떨리는' 손일지라도 그 문을 고이 잠그고 나오지 않겠냐고. '장님처럼 떨리는'이란 구절은 사실 굉장히 슬프다. 그 모든 추억과 아련함, 따뜻함, 또 꿈이 담긴 공간에서 나와 이제 이 빈 집의 문을 닫는 것인데, 당연히 아득한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난 이별과 이후에 '집을 부수듯' 기억을 손상시킨 행위들이 둘의 관계와 상대방에게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역시 얼마나 부끄럽고 파괴적일 수 있는 행위인지 영화 속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배우게 되었다. 마침 이 영화의 OST들 중 하나는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이다. 우리말로는 '모두들 언젠가는 배우게 되어있어요'라는 뜻이다. 이는, 힘들었고 아팠던 지난 사랑과 이별이 실은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추억이라는 걸, 모두들 언젠가는 배우게 되어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나의 열렬한 사랑을 끝내고,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깨닫고, 반성하고, 회의하다, 다시 조금씩 마음을 여는 이 지리한 성장을, <이터널 선샤인>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에 약간의 SF 요소를 섞어 두 시간이 안 되는 러닝타임에 담아냈다. 이 영화의 장르는 SF 스릴러나 멜로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한 편으로는 어쩌면 성장 드라마일 수도 있는 것이다.
위 문단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지난 모습의 이별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론, 혹은 희망한다고 한 건, 부디 나의 다음 헤어짐도 지난 사랑한 날들의 기억을 훼손할 정도로 모나지나 모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은 좋았던 날들로 빈 집 안에 그대로 놓고, 그래서 지난 사랑이 그곳에서 숨 쉬며 나의 남은 삶에 따뜻함을 불어넣고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요소가 추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추억은, 사람을 살아가도록 하는 아주 많은 것들 중 하나일 수는 있다. '추억이 아닌 것들'의 여집합이 추억이니까 이 기억들만 지운다면 얼마나 세상 살기가 편할까, 라는 편리한 사고방식에 대해, 그 기억들도 잘 간직해야 할 것들이야, 라고 <이터널 선샤인>은 대답한다. 추억과 추억이 아닌 것들이라는 게 사실은 그리 명징히 나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다만 '이터널 선샤인'이란 제목처럼 추억은 항상 빛나고 있는데, 그 빛이 온전히 네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성숙함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그때까지는 기억을 고스란히 잘 간직하라고, 영화는 조심스레 조언하기도 한다. 상처가 너무 쓰리고 아프더라도, 그게 원래 또 사랑이고 이별인 것이며, 언젠가는 그 찬란한 따뜻함의 온기를 느낄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러니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이터널 선샤인>은, 이별자의 <보이후드>이자, 기억으로부터 한 줌 추억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 지에 대한 하나의 사고실험같은 영화였다고.
헤어지는 건, 결국 한 관계에 마지막 인상을 남기는 일이다. 성실히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그 사랑을 잘 끝내고 사랑이 남긴 추억을 고이 간직하는 일도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사랑의 마침에 있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제기했던 사고 실험의 답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어떤 시인이 빈 집의 문을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잠그고 나오며 우리에게 이미 알려준 것도 같다. 이왕 시 얘기를 꺼낸 거, 이 글도 역시 '빈 집'만큼이나 참 좋아하는 어떤 시의 일부로 마무리 짓고 싶다. 굳이 시와 이 영화의 연관성을 찾자면, 원래 <이터널 선샤인>의 전체 제목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며, 이는 알렉산더 포프의 'Elosia to Abelard'의 한 구절이니까.
'시간의 힘을 빌리고 나면 사랑한 날의, 이별한 날의 풍경만 떠오르겠지
사람은 그립지 않고 그날의 하늘과 그날의 공기, 그날의 꽃향기만 니 가슴에 남을 거야.
그러니 사랑한 만큼 남김없이 아파해라. 그게 사랑에 대한 예의란다.
비겁하게 피하지마라 사랑했음에 변명을 만들지마라.
그냥 한 시절이 가고, 너는 또 한 시절을 맞을뿐
사랑했음에 순수했으니 너는 아름답고 너는 자랑스럽다.'
/서영아, '딸에게 미리 쓰는 사랑에 대처하는 방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