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기에 외로움을 알게 됐어요
이별 후에, 결국 이렇게 될 걸 알았어, 라고 조제는 스스로에게 읊조렸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도, 다가오는 것들에 매 번 태연할 수는 없다. 영화에 등장하는 건 쓰네오의 울음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헤어지던 낮에, 아마도 조제는 쓰네오의 그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작별을 '담백한 이별'이었다고 고백한 쓰네오는, 조제와 헤어진 뒤 가슴을 붙잡고 펑펑 울었다. '담백한 이별'. 이 건조한 다섯 글자를 쓰고 모니터를 한참 바라봤다. 볼 때 마다 먹먹함을 불러오는 다섯 글자다. '담백한 이별' 후에 이루어진 쓰네오의 울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도망침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사랑에 대한 뒤늦은 자각이었을까. 영화 초반부에, 쓰네오는 조제와의 여행을 떠올리며 '그때가 그립다'라고 말한다. 쓰네오에 따르면 둘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자신이 도망쳐버린 관계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몰라, 나는 영화를 보고 오래도록 고민했다. 지금이라고 이에 대한 답을 마련하게 된 건 아니다. 다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것 정도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동어반복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조제로부터 도망을 친 쓰네오도 그랬을 거고, 그런 쓰네오가 둘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두 사람이 자신들에게 '어쩔 수 없이' 다가올 것이 사랑의 결말이라는 걸 동시에 인지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휠체어를 사라'는 쓰네오의 말에, 조제는 '네가 업어주면 되잖아'라고 대답했다. 거기에 대한 쓰네오의 답변이 참 마음 아렸다. "나도 언젠가는 늙는다고."
늙음은 변화다. 늙음은 또한 죽음으로의 과정이다. '나도 언젠가는 늙는다고'라는 대사는, 쓰네오 자신 또는 조제와 쓰네오의 사랑 역시도 언젠가는 변할 수 있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함축했던 잔인함이었다. 이것이 발화되기 전까지, 둘 마음 속에도 이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있었던 것 같다. 조제가 점점 쓰네오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였던 것도, 언젠가 쓰네오가 떠나거나 둘의 사랑이 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불안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사랑이 아닌 연민의 감정으로라도 쓰네오를 곁에 두고 싶다는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른다. 조제는 자신이 가진 결여가 되려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리 없음을 '무기'에 빗댄 카나에의 무례함에, 조제가 마치 정곡을 찔리거나 치부를 들켜버린 사람처럼 분노한 것은, 조제 자신 또한 본인의 사랑이 '없음'에 빚지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늙는다고'라는 쓰네오의 대사 이후,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침묵한다. 어떤 생명이든 생로병사의 원칙을 따르듯, 언젠가는 그들의 사랑 또한 한 생명이 지듯이 저물고 말 거라는 걸, 그 순간 조제와 쓰네오 모두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둘의 침묵은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자신이 없어진거야?'라는 동생의 물음에, 쓰네오는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화장실에서 변기 위에 앉은 조제를 바라보다가 그녀와 포옹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쓰네오가 마치 조제에게 안기는 듯한 모습이다. 자신이 없어졌냐는 동생의 질문에 아니라고 말하지 못 한 것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랑의 끝을 본 것에 대해 용서와 이해를 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조제는 그런 쓰네오에게 '왜 그래?'라고 묻지만, 쓰네오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저 안겨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다로 향한다. 언젠가는 헤어지게 될 연인들이 미리 떠난 이별 여행이었다. 조제는 바다를 가리키며 '저쪽 반짝반짝 하잖아'라고 말하고, 쓰네오는 '저쪽이 어딘데'라고 답한다. 이 순간의 대화가, 마치 조제는 둘 사이에 빛났던 사랑을 이야기하고, 쓰네오는 언젠가는 유효하지 않을 마음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둘은 사진을 찍었다. 사랑의 영정사진이었다. 둘이 함께 누운 침대에서, 조제는 쓰네오를 만나기 전 자신의 삶을 어두운 심해에 비유해서 이야기 한다.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오는, 정적만이 있는 곳'이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기에, 외로움 또한 없던 세상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무채색으로 살아내던 조제의 인생에 쓰네오라는 사람이 등장했고, 덕분에 조제는 세상의 빛과 소리를 보고 들었고, 바람에 흔들렸고 비에 젖을 수 있었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라는 조제의 독백이 이어졌다. 조제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이 언젠가 끝날 거라는 걸. 그러면서도 덧붙인다.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고. 사랑이 끝나면 조제는 무척이나 외로울 것이다. 외로움조차 모르던 사람에게 주어진 외로움은 괴롭도록 외로울 테다. 그 아득한 외로움조차, 조제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그건 아마, 사랑을 통해 찬란함과 온기를 목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더라도, 마음 안에는 언젠가 품었던 빛과 따뜻함이 간직되고 있을 테니까. 헤어짐은 아프지만, 사랑의 생로병사를 겪으며 조제는 성장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쓰네오의 도망에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다. 쓰네오가 윤리 혹은 사회규범적으로 '틀린' 행위를 한 적은 없다. 헤어짐에 있어서도, 그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까지는 못 돼도 담백한 이별 정도는 해낼 수 있었다. 조제와 사랑하며 쓰네오가 감당해야 했던 여러 감정들을 우리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쓰네오는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했다. 쓰네오가 최선을 다 했던 지난 시간을 통해서, 조제 역시 한 뼘 자랄 수 있었다. 지난 날이 오직 모질거나 아프기만 하다면, 조제는 성장하기보다는 침전됐을 것이다. 조제의 성장은, 지난 날의 온기와 빛을 머금고 이루어졌다. 어떤 시를 인용하자면, 사랑이 조제에게 '이제 너에게도 외로움을 주겠다'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조제에게는 누구도 없었기에 그녀는 외로움조차 몰랐었는데, 찬란한 사랑의 바로 옆에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만들어진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하지만 조제는 그거대로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가을방학의 노래들 중 '사하'라는 제목의 음악이 있는데, 거기에는 '슬픔의 행복을 택한 그대가 자랑스럽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조제 역시도 쓰네오를 통해 '슬픔의 행복'을 느낀 것 아니었을까. 이 영화는 멜로 영화이자 조제의 성장담이기도 했다. 연애 덕분에 조제가 견지한 세계의 지평은 확장되었다. 그 세계에는 외로움도 존재하지만, 아마도 오래도록 간직할 사랑의 온기 또한 있었다. 추측해 보면 조제는 다시 어두컴컴한 물 안에서만 삶을 살아내지는 않을 듯하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연애는 헤어짐이라는 종착지로 향한다. 이별은, 연애의 마지막 모습들이 그리는 표준분포 그래프의 최고점에 위치한 보편이다. 그래서 이별은 참 아쉽고 힘들지만, 동시에 많은 걸 가르쳐주기도 한다. 조제의 연애는 이렇게 '담백하게' 마무리 되었고, 그 연애의 끝이 전혀 추악하지 않았기에 다행이기도 했다. 쓰네오와의 시절을 통해 조제 역시도 사랑의 기쁨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쁨의 한켠에는 외로움이란 녀석도 함께 숨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조제는 사랑의 힘과 놀라움을 더 열심히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찌됐든 조제는 이제 호랑이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유의미하게, 앞으로도 조제의 세상은 한 뼘 씩 확장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