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색, 블루>

잘 가요, 내 삶의 또다른 주인공이었던 당신

by 사랑의 천문학

세상 나쁜 짓은 혼자 다 하고 다녔던 조커 마저도, 스스로의 인생이 그의 영원한 적 배트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그에게 '넌 나를 완전하게 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 어떤 멜로 영화의 대사들보다도 더욱 간지럽고, 섹시했다. 물론 그게 조금은 난폭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작동한 게 흠이었지만. 조커가 배트맨에게 느끼는 애틋함이 이 정도니, 실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간절함과 편안함을 서로에게, 그리고 서로로부터 주고 받을 것이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에게 있어 엠마라는 여인은, 밴드 넬의 가사처럼, 완벽하지는 못했던 그녀의 삶을 완전하게 했던 주인공이었다. 우린 '인생이라는 무대'라는 은유적 표현을 자주 쓴다. 그 무대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의 연극은 모노드라마와는 거리가 멀고, 그래서 때때로 스스로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가진 인물들과 함께 러닝타임을 꾸려나가야 한다. 이는 사랑을 할 때 더욱 그렇다. 나만큼이나 소중한 누군가가 있기에 삶이라는 연극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아델은 엠마를 지독히도 사랑했다. 엠마 역시 아델을 아주 많이 사랑했다. 불행하게도 '지독히도'와 '아주 많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했다. 아델의 인생은 엠마가 있어야 원활히 작동하는 연극으로 바뀌어 있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엠마의 대사에, 너랑 있는게 '행복의 방식'이라는 아델의 대답이 어쩌면 그 증거일 지도 모르겠다. 아델 자신의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 혼자 만의 인생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아델이 미치도록 괴로워 한 건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델이 엠마를 불러냈다. 멜로 영화의 말미에 두 사람의 후일담처럼 등장하는 재회 장면은, 가끔은 억지스러운 먹먹함을 연출해내기 위해 악용되는 불량한 경우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예전에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만나, 분노와 원망도 없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한 사랑과 지난 날들을 담담하게 반추하는 건 애틋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게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이지만 않다면 말이다. 아델과 엠마의 재회 역시도 그랬다. 여전한 미련과 그리움을 갖고 있는 아델은,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 후에 엠마에게 그들이 수 백 번은 훨씬 넘게 나누었을 정사를 시도한다. 둘의 관계에서 아델의 욕구를 '정확한' 방식으로 충족했던 인물이 엠마라는 점에서(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참고), 이제는 확연히 기울어진 사랑의 저울추가 비극적이었다. 두 사람은 몸을 나누는가 싶었지만, 이내 엠마는 아델을 거부한다. 이제 엠마에게는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 아델과 엠마는 이전처럼 격렬하게 서로의 몸을 욕망해서는 안 되는 관계다. 아델은 엠마에게 간청한다. 너에게도 내가 가장 적합하지 않냐고, 이제 우리 둘은 다시는 볼 수 없냐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냐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의 사랑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전에 받았던 사랑에 비례하여, 상대의 마음이 얼마나 예전같지 않은 지도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아델이 엠마에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건,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자해와도 같던 확인 사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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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를 했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뻔히 알면서도 미련스러운 질문으로 굳이 스스로를 찔렀던 아델의 마음에도 피눈물이 흘렀다. 팔이나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마음껏 눈물샘을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델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정말인지, 한 번 더 물었고, 새로운 사람이 있다는 엠마의 최종적인 답변을 받고 속절없는 울음을 터뜨린다. 애써 웃으며, 하지만 눈물은 여전하게 흐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녀는 엠마에게 말한다. "미안해, 나 이런 거 알지? 이유 없이 우는 거." 어찌 그 눈물에 이유가 없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그래서 그녀 자신보다 더욱 중요한 존재였던 엠마라는 사람과의 사랑에 궁극적인 마침표가 찍혔는데. 여기서 엠마는 아델의 울음을 타박하지 않는다. 그만 좀 울라는 독촉도 않는다. 다만 잘 알고 있다고, 우는 것과 횡설수설 하는 것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아델을 위로한다. 두 사람은 몇 년의 시간을 함께 살을 맞댄 채로 공유해온 사이였다. 각자의 몸에 있는 가장 내밀한 비밀들조차도 경이로운 발견으로 여기며, 그렇게 치열하게 사랑했을 것이다. 이제 엠마의 마음은 떠났지만, 그들이 함께 품었던 지난 날의 온기마저 깨끗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엠마는 아델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영원히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조금은 덜 지독하게 사랑했던 한 사람의 너그러움이자, 마찬가지로 조금 더 지독하게 사랑받았던 한 사람의 고마움이었다. 엠마의 연극에서 아델은 중요한 배역이긴 했으나, 그녀 자신만큼이나 가중치를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델의 삶은 그녀와 엠마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연극이었다. 조금 더, 많이, 치열하고도 미치도록, 또 지독하게 사랑해서, 그들 사랑의 끝에 아델은 더욱 아파야 했다. 이별의 고통은 사랑의 잔량과 비례한다.


아델은 엠마에게, 네가 그립고, 너를 만지고 싶고, 서로 바라보며 너의 숨소리를 듣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최초의 단계에서 사람은 누구나 혼자지만, 이 진실이 이별로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데서 기인한 쓰린 마음을 달래는 데 그리 유효하지는 못하다.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나누던 시절에, 엠마는 아델에게 자아실현 같은 걸 하면서 행복해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아델은 자아실현같은 원대한 무언가가 없어도 엠마라는 한 사람의 옆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자족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아델의 삶은 엠마와 함께하는 연극이었기에 그 무대에 빛이 들어올 수 있었다. 아델과 엠마가 결별했던 단초는 아델이 제공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마치 엠마는 아델이 한 번 실수하기를 바랐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엠마는 분명 예전같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이별 사유를 찾을 수 없었던 상태처럼 보였다. 필요 이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엠마가 아델에게 분노했던 건, 어쩌면 위악이었을 수도, 또 혹은 스스로에게 내는 화였는 지도 모르겠다. 영화 후반부 두 사람의 재회 장면에서의 대화는 영화를 볼 때 마다 유독 아프고 슬프다. 아델은 엠마에게, 다시 못 보는 건지 물어보고, 이윽고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만약 엠마가 아델을 용서하지 않았다 말했다면, 그건 용서를 받으면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다는 소리일 테니 아델의 마음이 착잡하기는 해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엠마는 아델에게 용서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델은, 결코 듣지 않고 싶지 않았던 대답을 들어내기 위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냐고 엠마에게 물어보고, 엠마는 고개를 좌우로 돌린다. 귀찮게하지 않겠다는 말을 엠마에게 건네고, 엠마는 다시 아델에게 귀찮은 적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네게 '무한한 애틋함을 영원히' 느낄 거라고. 멜로 영화를 떠올릴 때 절대 잊을 수 없는 '무한한 애틋함'이란 구절은 이 맥락에서 탄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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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이별이란 차라리 우주의 붕괴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게 과학적 진리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나의 일상이 공전한다는 건 사랑의 관성이다. 그러나 죽었다 깨어났다 다시 죽더라도 아마 지구는 태양을 돌겠지만, 사랑은 그만큼이나 질긴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죽음이 그렇듯 사랑의 죽음 또한 종종 '죽을만큼' 괴롭다. 어느 정도의 권태와 실망, 혹은 다른 이에 대한 호기심이 중간 중간 있었더라도, 헤어짐이라는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끝'은 전혀 낯선 고통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다. 특히 아델처럼 사랑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경우라면 말이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게 무엇인지, 아델의 멈출 수 없던 눈물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엠마가 아델에게 했던 '무한한 애틋함을 영원히 느낄 거야'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옛 연인의 따뜻하고도 다정한 마지막 위로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델의 마음에 박아놓은 영원한 쐐기다. 무한히 애틋하지만, 찰나의 사랑조차 되지 못하는 엠마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매일을 마주했고, 그래서 내일이 당연했으며, 서로의 손길은 익숙한 편안함이었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주고받던 숨소리는 그 어떤 달콤한 음악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을 그들에게, 이젠 완전히 저물어버린 사랑이 내뱉은 최후의 선고였다. 사랑이 무너진 자리에 애틋함이 피어났다. 그렇기에 '무한한 애틋함'에는, 무한한 시간이 흘러도 결국 찰나의 사랑조차 될 수 없다는 슬픔이 서려있다. 사랑과 애틋함은 분명 다르다. 한때는 누가 누구를 앞지르고 말 것도 전혀 계산할 필요조차 없던 아델과 엠마의 감정은, 이토록 다른 모습과 이름으로 서로를 대하게 되었다. 눈물이 범벅이되도록 울면서 이 사랑이 끝났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아델의 모습에, 영화를 보는 나 역시도 괴롭도록 슬펐다.


지금보다는 사랑의 힘을 더 열심히 믿었던 어떤 날에, 모든 진심과 정성으로 이런 편지를 쓴 적 있었다. 나만큼이나 중요한 주인공이 되어 준 당신에게 정말 고맙고, 또 많이 사랑한다고. 우리의 영화는 계속될 거라 착각했다. 어찌됐든 그 사랑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 가는 일은 없으리라고 섣불리 예상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고작 한 줌의 애틋함으로 변하여, 미안함과 고마움 정도만 뒤섞인 감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화학 공식 따위는 내 머리에 없었다. 사랑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영원할 것이기에 사랑이어야 했다. 그토록 뜨겁고 간절한 마음이 식는 건 말이 안 됐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약속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서 우리 만큼 특별하고 열렬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어딨다고, 우리만큼은 반드시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 어줍잖게 확신했다. 우리만큼은, 이라는 구절이, 우리마저도, 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젠 너를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 지금 돌이켜보면 지원했던 학교의 합격자 명단 화면에서 확인했던 '불합격'보다 몇 배는 더 잔인했던 문장이었다.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지 몰라, 영화 속 아델처럼 미치도록 울었던 기억 밖에 없다. 폐허가 되어버린 내 삶의 무대를 바라봤다. 우리 두 사람이 나누었던, 그리고 나누었어야 할 대본은 때 지난 복권보다도 더욱 부질없는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 사람이 있었야 가능했던 인생이 되었는데, 다시 어디서부터 어떻게 복구해야 할 지 몰라, 아주 오랜 시간을 괴로워 했다. 엠마가 아델에게 결별을 선언할 때, 아델은 '너 없이 어떡하라고'라며 펑펑 울었다. 이 대사에,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이별하던 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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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로 다친 마음을 수리하는 일은 전후 복구 사업마냥 아주 지난하고, 지리했으며, 그래서 무척이나 오래걸렸다.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이 설정해야 했고, 그렇게 우리의 우주를 장식했던 별들을 하나씩 뗄 때 마다 종종 온 마음을 부여 잡고 아파했다. 그 과정이 죽도록 힘들어, 관계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도 용납되지 못 할 못난 모습들을 많이도 보였다. 사랑의 생명력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만큼이나 중요했던 연극의 주인공이 그리 허망히 퇴장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괴로움과 슬픔, 그리고 혼자 남겨진 비참함이 어느 정도 사라진 지금에서야, 정중하게 그 사람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은 게, 이제는 또 가장 슬프고도 힘든 사실이다. 마주치기도 힘들고, 또 애써 재회하기도 어려운, 아니 그럴 수도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우리다. 영화를 처음 볼 때는 헤어짐의 아픔에 공감했다면, 이후에는 헤어짐의 온도차에 후회했다. 왜 나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과 엠마처럼, 모질지만 정확하고, 따뜻하지만 확실한 이별을 할 수 없었는지. 누군가의 시처럼,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잘 헤어질 수 있었을 텐데. 나만큼이나 중요했던 그 시절의 주인공과, 꽤 괜찮은 작별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이런 인사 정도는 건네볼 수라도 있지 않았을까.


"잘 가요, 내 삶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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