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시간은 흘렀고, 사랑은 바랬다.

by 사랑의 천문학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시작은 작은 우연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놓쳤다. 정시성이 생명인 대도시에서 낙오자는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언제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조금 재수 없는 일. 하지만 마침, 그때 누군가가 첫 차를 같이 기다릴 장소를 아냐고 물었고, 일면식도 없는 두 남녀도 그곳에 합류하게 된다. 역시나 '마침' 그곳에는 남녀가 모두 아는 거장이 한 명 앉아 있었고, 둘은 그 사람의 존재에 눈을 반짝였다. 서로가 같은 즐거움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두 남녀는 밤을 새어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우연히 막차를 같이 놓쳐 만나게 된 상대방이, 자신에게는 너무 커다란 존재인 누군가를 함께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환희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 공통점은 정말이지 경이롭도록 즐거운 공통점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이 막차를 놓친 상대방이 실은 운명과도 같은 연인이 될 수 있을 확률을 빠르게 어림잡아 계산해보았을 테고, 그 낮은 수치의 다른 이름이 '기적'임을 새삼스레 알게 되지 않았을까.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의 두 주인공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


꽃다발을 살 때, 나는 아직도 종종 망설인다. 지금 이 순간 잔뜩 만개해있는 꽃을 고를 것인가, 아니면 이틀이나 사흘 정도 뒤에 더욱 활짝 필 꽃을 선택할 것인가. 그 사람의 환한 웃음을 담은 활짝 핀 꽃도 좋을 듯하고, 반대로 조금 더 오래 보고 늦게 시들 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늘 고민에 빠지게 된다. 꽃다발의 꽃은 언젠가 시든다. 얼마나 잘 관리를 하든, 결국 그렇게나 예쁘고 아름다운 꽃 송이들도 고개를 떨구는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 꽃이 지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꽃도 죄가 없고, 꽃을 선물한 사람도 죄가 없으며, 선물 받은 꽃다발을 화병에 예쁘게 꽂고 이를 사랑스러운 얼굴로 쳐다봤을 사람에게도 물론 잘못은 없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는 이렇게 생명을 다하고 마는 일이 세상엔 참 많다. 꽃송이는 단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그렇게 저물고 마는 것들 중에는, 슬프게도 '사랑'도 있다.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에서는 '연애는 생물이라 언젠가의 기한이 다하면 끝나게 돼 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변하지 않는 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진실 뿐이다. 눈부시도록 찬란했던 사랑도 그렇다.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바랬다. 이젠 시들어버린, 한 땐 너무 소중하게 해사했던 꽃송이들처럼.

1280.png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음에도'라는 부분이다. '인과관계'라는 단어의 민망하도록 초라한 미약함을 확인할 때이기도 하다. 언제나 서로를 있는 힘껏 껴안았던 두 사람이 힘겹게 헤어지게 된 것인데, 슬프게도 둘 모두에게 뚜렷한 잘못이 없다. 두 사람이 서로 아닌 사람을 원했거나 아니면 상대에게 아주 무례한 짓을 저지른 적은 없다. 그러니 그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들 앞에 만들어졌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학생일 때 만났다. 그러다 각자 구직활동을 시작했고, 취업 후에는 각자 삶의 새로운 단계에 힘겨이 적응하려 애썼다. 그건 절대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그럴 나이가 되어서 각자에게 당면한 생을 마주한 것에 불과하다. 둘이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 것도, 어떻게 보면 서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현실은 서글프다. 서글픈 현실에서는 언제나 계산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무엇도 얻거나 지켜낼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목표는 연인과의 행복한 사랑을 '현상 유지'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걸 해내기 위해 취업을 한 남자 주인공은 지나치게 바빠졌고, 일과 삶의 경계가 지워진 삶을 살아야 했으며,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시작한 일이 되려 서로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매일 쌓는 결과가 낳온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이렇다고 이를 남자 주인공의 잘못으로 몰아 세우는 건 부당하다.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한 도구가 어느덧 삶의 주가 되어버리는 어리석음은 꽤나 빈번히 발생하는, 아니 어쩌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초년생의 미숙함이기도 하니까.


시간이 흘렀고, 사랑은 바랬다. 막차를 놓쳐버리는 감사하고도 황홀한 우연을 주었던 삶이, 이번에는 서로가 서로를 보듬던 삶의 거처를 참 비정하게도 앗아갔다. 어떤 시 구절처럼, 사랑이 더 이상 힘이 되지 않게 된 셈이다. 되려 사랑이 조금은 짐이 되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지를 하루하루 매일마다 되새기며 살아가기에, 세상은 조금 벅찬 곳이고 사람은 다소 무력하고 어리석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혹은 상황이 아주 조금만 좋아지면 곧 예전처럼으로 관계를 돌려놓을 수 있을거라 믿고는 한다. 그래서 잠시 사랑을 미루고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닫는다. 하지만 이는 틀리고 틀린 오답이고 착각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님에도 사랑에는 생채기가 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람에 낙엽이 하나 떨어진다고 바람에게 왜 이렇게 모지냐고 따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생채기들 중에는, 더 이상 봉합이 안 되는 상처도 존재한다. 사랑을 지켜내는 게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찌르고 있는 것이라는 걸 자각할 때, 우린 이 사랑의 지속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너무나 당연했던 사랑이었는데, 이를 오늘까지의 일들로 마무리 해야하나 싶은 아득한 슬픔과 아찔함을 느끼는 때이기도 하다. 결국 그렇게나 빛나고 특별했던 사랑도, 이렇게 바래고 만다.

45190_81232_213.jpg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헤어지는 건 아픈 일이다. 너무나 당연했던 이 사람의 존재가 더 이상 상수가 아니게 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기도 하다. 아주 아름다웠던 꽃다발이 시들 듯이, 딱 그렇게 예뻤던 사랑도 바래고 만다. 너무 부조리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삶은 이를 꾸역꾸역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윽박지른다. 영화 말미에는 이 연인과 비교되게,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생기어린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땐 우리도 저랬었는데,라는 눈빛으로 두 사람은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 지낸 두 사람이었다. 이제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며 안녕의 인사를 나눠야 한다. 헤어지는 건 현실이라, 살던 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가구는 또 어쩌고 함꼐 키우던 고양이는 누가 데려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눠야 했다. 지리한 현실은 가뜩이나 슬픈 헤어짐을 더욱 미어지게 만든다. 헤어지는 건, 너무 많은 헤어짐과 단절들의 시작이다. 막차가 끊어져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이었다. 이제 두 사람의 생의 노선도에 서로는 없다. 이미 지나버린 역이다. 그 역에서 때론 즐거웠고 때론 아팠겠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함을 공유할 수 있었다.


5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한 두 사람은, 영화 말미에 어쩌다 잠시 마주치게 된다. 역시나 우연이 선물한 이 순간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안녕의 손짓을, 뒤를 돈 채 나눈다. 어쩌면 가장 처절하고 나약했던 시절을 함께한 두 사람들이겠고, 이 손짓은 서로의 지난 시간과 삶에 대한 안녕일 수도 있다. 화려했던 꽃다발은 시들었다. 이제는 바스락거리기까지 한 꽃다발이기도 하다. 그토록 생기가 넘치던 꽃이었는데, 이제는 만지면 부스러기가만 떨어진다. 부스러기 하나하나가 어쩌면 서로가 함께한 지난 시간의 작은 조각들이다. 바닥에 떨어진 꽃 부스러기를 쓸어내며, 마음 한 켠이 조금은 아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꽃을 건넬 때의 쭈뼛거리는 설렘과, 꽃을 받았을 때 꽃보다 더 예쁜 환한 미소는 쉽게 잊히는 기억은 아니다. 그 순간의 표정으로부터 생각나는 그날의 날씨와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도, 선명하게 기억될 순간이 아닐까. 누구도 잘못하지 않아 아쉬운 헤어짐이지만, 그래도 한 땐 찬란했던 꽃다발 같은 사랑을 나누었다. 경이로운 감사함은 아마 애틋함이 되어 두 사람의 여생에 따뜻함을 더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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