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hemian Writer Mar 11. 2023

디에이드, '다시, 봄'

해사했던 어떤 날의 빛나던 우리

    날씨가 극단을 오가다 못해 이에 대한 예측과 기대까지 다소 부질없어지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날씨에도 꽃은 폈다. 대단한 놈들. 얼마 전 집을 나서다 아파트 앞에 만개한 벚꽃들을 보고 봄이 오기는 왔다는 걸 얼핏 느꼈다. 봄만큼이나 수줍음 많은 계절은 없는 듯하다. 노크도 없이 방문해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봄을 '봄'이라 처음 이름 불렀던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조금 궁금하다. 보통의 감수성은 아니었을 듯하다.


    나는 봄에 태어났다. 만물이 역동하는 이때에 나까지 피어났다니. 만물이 역동하니 굳이 나까지 역동적일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런가, 내게 있어 봄은 설렌다기보다는 조금은 막막하고 갑갑한 계절이다. 새 학년 새 학기도 조금은 부담스럽고, 새 학년 새 학기에 보는 첫 중간고사는 그저 짜증만 난다. 누군가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성적에 대한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던 나는 시험이 다가오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고, 내 생일은 그럼에도 다가온 시험이 울리는 경적이었다. 학창 시절의 그랬던 경험들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봄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입대도 봄에 했다. 맙소사. 그러니까 버스커버스커가 아무리 '둘이 걸어요'라고 노래 부르고 로이킴이 '봄봄봄 봄이 왔네요'라고 해도 도무지 설레지 않는다. 되려 괜히 좀 울적해진다. 봄의 기운에 설레는 누군가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과의 괴리 때문에 다소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저 즐거움과 설렘의 무리에 나만 못 끼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어떡하겠나. 봄의 찬송가들을 아무리 들어도 내 마음은 여전히 이런 걸. 그래도 세상에는 봄에 얼마간의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관계없이 평소에도 잘 듣는 노래지만, 어쨌든 나의 봄 캐럴곡을 고르라면 지금은 디에이드로 이름을 바꾼 어쿠스틱 콜라보의 '다시, 봄'이다. 지난 사랑과 봄의 애상을 이야기 하는 이 담담한 곡을 들으면 그래도 위안이 된다. 어떤 이들에게 봄은 미치도록 설레고 풋풋한 계절일 수 있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어쩐지 울컥할 일이 많은 날들이 바로 봄이다.


    사랑은, 그래서, 그럼에도, 그러니까, 그래도, 그리고, 하지만, 등의 무수한 접속사들로 이루어진 '한' 문장이다. 그러니 이별은, '그래도', '그럼에도', '하지만', '그러나'에도 찍히지 않았던 마침표를 마침내 찍고 길고 긴 문장을 마무리하는 일이다. 제 곳에 위치한 마침표만큼 힘이 있는 건 없다고, 어떤 문장가는 그렇게 말 한 적이 있었다. 이별의 마침표는 마음에 찍히는 점이자, 푸른 멍이다. 이별은 조금의 허무함도 동반하는데, 그건 아마 수많은 접속사들에도 끊이질 않았던 '우리'의 문장도 결국 이렇게 끝나버렸다는 허탈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 문장의 주체였던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글씨를 오래 쓰다 보면, 손에 굳은 살이 박힌다. 사랑도 마찬가지라, 이별과 동시에 '우리'였을 때의 감정을 한꺼번에 털어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다. 우린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가 아닌 우리'를 애도한다.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폭식을 하며, 누군가는 영화를 보고, 또 누군가는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누군가는, '우리였던 우리'를 몹시나 그리워하고 이를 추억할 테다. 어떻게 봐도 마침표지만, 혹시 이 마침표가 쉼표로 바뀌지는 않을까 기대할 지도 모른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서로에게 또 서로로부터 감정을 주고 받는 게 연애겠지만, 그것이 완벽한 등가 교환은 아닐 때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헤어짐 후에도 여전히 작별한 그 곳에 고여있고는 한다. 아무리 자신이 주인공인 인생이라지만, 우리의 삶은 사랑을 할 때 만큼은 나만큼이나 중요한 누군가와 함께 꾸려가는 연극이 된다. 그 연극의 어떤 순간은 눈부시고 황홀하며, 그래서 경이의 한 형태가 바로 사랑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이별 후에는, 더 이상 '우리'라는 연극은 없을, 그러니 폐허라고 봐도 무방할 무대를 가만히 응시하게 된다. 만약에 남겨진 이라면, 이 무대를 바라보는 눈빛과 시선이 더욱 저밋할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별 노래들 중에, 떠난 사람보다는 남겨진 이의 음악이 더 많은 것은 이 때문일 테다.


    어쿠스틱 콜라보의 '다시, 봄' 역시 남겨진 이의 노래다. 이별에 고여 있던 이 곡의 주인공은, '다신 볼 수 없는, 가슴 벅차도록 아름다웠던 우리'를 그리고 있다. 찬란하고 눈부셨던 지난 날들의 기억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주인공에게 다시 '문자그대로'의 봄이 찾아 왔다. 가사 속 '너와 함께한 나의 봄'은, '한 번의 미소'와 '해사한 눈웃음', '부드런 입맞춤', 그리고 '아쉬운 손 인사'들과 함께 '사랑을 속삭이며 행복해하던, 너와 나만 가득했던 우리'의 시간이었다. 사실 이 노래를 언제 어떤 경로로 내 스마트폰에 받았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음원사이트를 뒤적거리다가, 별 생각 없이 다운로드했던 노래였던 것 같다. 그러다 몇 년 전, 무작위로 노래들을 듣다가 이 음악이 나왔는데, 순간 모든 걸 멈추고 끝까지 집중해서 들었을 정도로 마음이 울컥해짐을 느꼈다.


    지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노래들은 정말 많다. 당장 그리움에 관한 노래들의 제목을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흔한 주제를 노래한 아주 많은 음악들 중에서도, 지난 시절과 그 기억이 유독 아리고 저밋하게 묘사된 그리움이 있다. '다시, 봄'의 '해사한 눈웃음'이란 부분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입술을 깨물었던 구절이었다. '해사하다'는 특별하지는 않은 단어지만 그렇다고 노랫말들에 잘 사용되지도 않은 단어인데, 상대의 눈웃음을 '해사하다'고 표현한 것에서 지난 봄이 어땠는지 충분히 설명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배운 게 몇 가지 있는데, 먼저 어떤 상처는 절대 치유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때, 지난 날 느꼈던 어떤 온기는 역시 시간이 아무리 흐른들 식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해사했던' 그 날들은, 지금도 그렇게 마음 안에 남아있다. 돌아갈 수 없다는 애틋함과, 그리도 예쁘게 웃어주었다는 고마움과, 더 잘해주지 못 했다는 미안함과, 그리고 아직은 남아있던 사랑을 머금고 고개를 숙여야 했던 눈물이 모두 모여 마음 안 '온기'의 화학 공식이 되었다. 그 시절의 연애는 유독 '접속사'들이 많은 연애였다. 우리의 문장에 가장 많이 쓰인 접속사는 다름아닌 '그러나'였다.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우린 사랑했고, '그렇지만' 우리 역시 헤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이렇게도 세상 부당한 일이 또 있나 싶었었다. 노력한다고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세상은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이야기에까지 마침표가 찍히는 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따뜻한 추억을 남겨준 사랑이라는 건 고맙지만, 그 사랑을 왜 이제는 '추억'이라 불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을 그래도 납득해야 하는 게 자라는 일이고, 납득할 수 없던 것들의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되는 게 성장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덜 컸나 보다. 아직은 그 시절의 일들을 온전히 납득하지는 못하고 있으니까.


    다만 이제는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열렬히 사랑하다 헤어진다는 게 꽤나 보편적인 숙명이라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관계 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시절의 기억을 어떻게 간직하는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시, 봄'에는, '아직 버릴 수 없는 기억들, 난 그 안에서 너와 하루하루를 살아'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미치도록 버리고 싶었던 기억이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별과 망각 앞에서 나는 상당히 무력했지만, 지나고 보니 부질없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에서 피어난 온기가 있었다. 마치 이런 날씨에도 만개한 꽃들처럼 말이다. 애써가며 버릴 수 있다면 얼마든 버리겠지만, 어차피 그럴 수는 없다. 버리려한다고 애쓴다는 건 아직 버릴 게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어쩌면 이별에 있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만약 그 시절의 사랑이 해사했고 따뜻했다면, 그 온기를 가슴 안에 품고 고맙고도 애틋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인 지도 모른다. 비록 마침표가 찍혔지만, 힘겹게 써내고 끝낸 그 문장 덕분에 마음 안에는 굳은 살이 박혔으니. 써내려간 그 문장을 바라보며, 마음 속 굳은 살의 알싸한 아릿함을 푸는 것이, 아마도 경이로웠던 한 시절을 충분히 애도하는 하나의 방식일 테다. 다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어 마음 안에서 되뇌인다. 가끔은, 그 시절이 너에게도 해사하게 기억되는지. 해사했던 우리를 너도 그렇게 기억하는지. 가끔은 그렇게라도, 우리가 같은 생각을 나누는지.

매거진의 이전글 성시경, '잃어버린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