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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Mar 10. 2023

성시경, '잃어버린 것들'

그것들을 잘 지켜내고 있니?

    스물아홉이 됐다. 전 국민이 떡국을 한 그릇 씩 먹으며 함께 나이가 올라가는 기괴하고도 공평한 나이 시스템 때문에, 나는 어느새 20대 끝자락에 서있게 되었다.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의 주인공이 된 건 지도 모르겠다. '서른 즈음에'에서는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 이별이 단순히 연인과의 작별은 아닌 걸 깨닫는 중이다. 사랑뿐만 아니라, 꿈, 야망, 소망 등과도 '안녕'의 인사를 나눠야 할 시기다. 원래도 변동성이 심한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남은 인생도 지금 모습으로 좋은 의미든 아니든 고착화될 확률이 높다. 언젠가 어른이 되기를 열렬히 바랐던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되면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불안과 우울이 줄어들고, 삶이 단단해지며 안정성이 꽃피울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때때로 우울하다. 이런 소박한 바람조차도 이별해야 하는 게 서른이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서른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지난 10년을 돌아보았고 앞으로의 10년을 예상해보았다. 미련이 많이 남았고, 그렇다고 미련의 갈급을 해소할 대단한 계획 같은 것도 없다. 아마 이 상태 그대로 나는 서른을 맞이하지 않을까 싶다.


    감정의 진폭이 참 컸던 20대였다. 손톱만한 희망에도 미련스러운 기대를 품었고, 손톱보다도 작은 희망인 줄 알면서도 깊이 절망했다. 20대로 지내며 참 많은 걸 하긴 했다. 경험적인 측면에서 '이걸 꼭 해 볼 걸'이라는 후회가 드는 일은 별로 없다. 그건 무척 다행스러운 사실이다. 과거의 값들이 정교하게 모인 방정식의 결과가 현재의 내 모습이라면, 그게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되돌려 무언가를 수정하고픈 일들 또한 그리 많지 않다. 성공적인 20대는 분명 아니었다. 불안과 우울을 때때로 느꼈으며,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서투르고 섣불렀던 일들도 참 많았다. 가끔은 '그때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찾아와 애꿎은 이불을 발로 찬 적도 있긴 하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는 게 절반 정도는 맞는 소리라서, 당시의 슬픔과 부끄러움 혹은 좌절의 아픔이 그때 그래도의 통증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다행스러운 사실이다. 상처가 남긴 흉터가 선명한 게 몇 있지만, 아픔 자체는 조금은 줄었다. 여기까지 아주 지난한 시간이 걸렸다. 남은 날들은 행복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저 불행과 친해지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시경의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노래 가사에는, '소리 내 울어버리기엔 어느 사이 무거워진 나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눈물이 조금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그럼에도 근래에 소리를 내어가며 펑펑 미친 듯이 울었던 기억은 희미하다. 때론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그 순간에도 소리 내 울지는 못했다. 그래서 가끔은 세상 무너질 듯 '울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조금도 기억나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울음이 하나의 버튼이었을 것이다. 배가 고프다, 힘들다, 아프다 등등. 모든 건 울음으로 표현됐겠고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을 테다. 무언가가 필요함을 동력 삼아 눈물을 흘리는 시기를 훌쩍 지나니, 슬픔과 힘듦에 우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눈물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나간 일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자'라는 영화 대사가 있는데, 여기에 나는 이를 악 물고 반대한다. 지나간 일이 아니면 새로운 눈물을 어디에 낭비해야 할지 모르겠으며, 무엇보다 눈물은 낭비하라고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울음의 소용이 분명 실재하며 눈물은 절대 무가치하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것들이 분명 내게도 몇 가지 존재한다. 앞으로의 삶이 그들을 너무 약탈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들이 앗아가짐으로 눈물을 흘리는 일은 무척 괴로울 듯하다.


    유독 상실이 많았던 20대였다. 그건 사람이나 꿈, 혹은 사랑이나 가치이기도 했다. 반드시 꼭 지켜내고 싶었으나, 결국은 내 옆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것들이다. 어쩌면 그 상실들 때문에 김정의 진폭이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바닥이겠지,라고 생각한 순간 바닥 이하의 곳으로 감정이 침전됐던 경험도 적지 않았다. 참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뒤, '서른 즈음에'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가사에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애초에 낙관과 희망을 그리 믿지 않는 조금 회의적인 성격임에도, 어떤 상실은 무척이나 아팠고 외로운 두려움을 남겼다. 최근 나의 스무 살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과거의 내게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았던 걸 보니, 현재의 내게 아쉬움이나 미련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통의 편지만 더 쓸 수 있다면, 10년 후의 내게 한 마디만 물어보며 당부하고 싶다. 그렇게 소중한 것들을 잘 지켜내고 있냐고. 꼭 그들을 잘 지키며 그 나이까지 왔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소중함과 상처의 고통은 대개 정비례 관계를 이루었다. 너무 아픈 마음은 너무 소중했던 것들의 이탈로부터 잉태됐다. 10년 뒤 내가 소중한 것들을 잘 지켜내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들을 지켜내는 일이 너무 모질지만은 않기를 역시 기도한다. 앞으로의 10년 동안 마음이 다치는 일이 많이 없기를 소망한다.


    어릴 적 생각으로, 30대가 되면 단단한 어른이 되어 삶의 가벼운 고통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20대의 끝무렵에 오니, 30대가 된들 지금의 나와 뭐가 그리 달라질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그때 더 많이 아파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도 든다. 지금 소중한 것들이 그때는 더욱 큰 의미가 부여되고 간절해질 수 있으니까. 절실했던 모든 것들과의 이별은 지독한 아픔을 남긴다. 분명 10년 후의 내가 소중하고 절실한 의미들을 잘 지켜내고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마음이 다치기 전에 그것들을 포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기를 소망하는 마음도 있다. 차마 버릴 수 없어서 품에 꼭 안고 무척 아파할 수밖에 없었던 20대가 끝나고 나면, 차마 버릴 수 없던 것들도 애써가며 버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기를. 세상 모든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든 무언가를 지키려는 것보다, 너무 벅찬 순간에는 그걸 용기 있게 내려놓으며 나 스스로를 지키고 있기를 바란다. 그런 과정에서 눈물이 다시 흐를 수도 있지만, 그 울음을 타박하지 않고 마음껏 낭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참 많은 것들을 지켜내고 싶지만, 그중 가장 먼저 지켜내야 할 것은 바로 '나' 스스로라는 걸 잊지는 말기를.


    참 많이 잃었고 그로 인해 많이 울었던 지난 20대를 지나, 앞으로의 나는 '안녕'할 수 있기를 마음으로 바란다.



    2022년 작성한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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