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hemian Writer Aug 16. 2023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So Goodbye'

그렇게 언젠가의 짝사랑을 묻으며

떠올려 보면 2008년은 참 이상한 해였다. 야구 대표팀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전승 우승을 거둔 해. 당시 내가 너무도 좋아했던 그룹 SG워너비에서 리더 채동하가 나가고 이석훈이 새 멤버로 들어온 해. 밴드 넬의 불후의 명곡 '기억을 걷는 시간'이 세상에 나와 1위까지 찍었던 해.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처음으로 진심으로 좋아해 본 한 해였다. 그 기이한 해의 시작 즈음, 그러니까 지금 나이를 딱 반으로 가른 나이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하얀 피부의 동갑내기 여자애를 만났다. 우연히 같은 날 응시하게 된 한 학원의 입학 테스트에서였다. 같은 레벨의 반에 동시에 합격한 우리는, 정말 우연히 짝으로까지 자리를 배정받았다. 이런 걸 보면 우연이 내 편인 적이 있긴 했다. 아무튼. 늦게서야 친해지기 시작했던 우리였지만, 그런 것 치고 친해짐의 깊이는 꽤나 빠르게 진전되었다. 싸이월드 덕분이었다. 그땐 싸이월드라는 게 세상에 있었다. 학원이 끝나고, 영어 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그 아이와 늦게까지 싸이월드 쪽지를 주고받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그 아이와 나누는 그 쓸데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내겐 유난히 소중했다. 당시 핸드폰이 없던 나는, 매일의 어두운 밤만 초조히 또 조급하게 기다렸다.


공부를 참 잘했던 친구였다. 같은 고등학교를 목표를 두었지만, 망할 놈의 토플 성적이 뜻대로 나오지 않았고 난 차선책의 학교로 눈을 돌렸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었다. 이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말 못 할 안타까움이 진하게 찾아왔다. 최초 목표가 포기됐다는 좌절감보다는 그 친구와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다는 게 혼자 안타까웠다. 사실 부모님으로부터 온갖 지원들을 다 받고 컸기에 딱히 원망할 건 없었음에도, 나는 살면서 유일하게 아쉬움을 느꼈다. 혹시 나를 진작 어학연수라도 보내줬더라면, 그래서 도무지 나오지 않는 거지 같은 성적의 스피킹 영역에서 사람스러운 점수라도 얻을 수 있었더라면, 그 아이를 계속 볼 수 있었을 텐데라는 철딱서니 없는 심통이었다. 그때 난 에어백도 없이 사춘기를 정통으로 맞은 상태였다. 머릿속은 늘 이 아이로 가득했다. 그러나 살던 동네의 유난한 교육열이 문제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나의 정신머리에 쏟아질 힐난과 꾸짖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친 동네였다. 중2짜리들에게 토플 100점 이상을 표준으로 요구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일종의 광기의 경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에게는 미침을 미쳤다고 판단할 여유 따위란 없었다. 그런 세상에서 <그해 우리는>과 같은 첫사랑 낭만 같은 걸 진지하게 탐구하는 건 제정신 아니라는 소리나 듣기 좋은 결격 사유고 흠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조차 죄악시됐던 날들이었다. <러브 액츄얼리>의 꼬마는 사랑만큼 중요한 게 있냐고 질문하는데, 나는 그 어린 아이보다 비겁했고 용기가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을 더 이상 맘껏 볼 수 없는 답담함과 괴로움을 통제하는 건 쉽지 않은 것 이상으로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의 위안은 학원을 끊고도 밤새 오고 갔던 싸이월드 쪽지였지만 이마저 어느 순간 뜸해졌다. 쪽지라는 사치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뒤틀린 열등감이 문제였다. 사춘기를 꽤 오래 겪으며 나의 성적은 망했고, 그 예쁜 아이는 점점 지향하던 학교와 가까워지는 성과를 냈다. 그 아이의 승전보들이 이어질수록 나는 다소간의 열등감과 불안함을 느꼈고, 그래서 무너진 성적을 안간힘을 써서 복구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던 중3 때, 나는 단짝 친구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교우관계를 단절했다. 합격이 절실했다. 소기의 결과물을 가져야 그 친구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쯤의 결괏값은 있어야, 끊어질 듯한 인연의 끈을 다시 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시는 지옥같이 잔인했다. 그 친구는 합격했고, 나는 떨어졌다. 떨어진 주제에 마음을 고백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졸업식 날 큰 상을 받은 그 친구에게, 나는 차마 '축하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눈이 마주쳤고 나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살면서 내가 가장 못났던 순간들 중 하나였다. 보통 이런 글을 쓰면, "그랬던 친구가 지금 제 옆의 아내랍니다"라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던데,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살면서 나는 그 친구를 종종 생각했다. 아마 그 친구는 아니었겠지만. 닿을 수 없는 누군가에 오래도록 골똘히 매진하게 되는 건 참 서글프고 애처로운 일이었다.


그랬던 그 친구의 결혼 소식을 몇 달 전에 접했다. 그래 뭐 이 나이면 결혼하고도 남을 나이지,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 얘기를 듣던 순간에, 갑자기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의 부고를 우연히 아프게 들어야 했던 소년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무가치한 감정 혹은 자의식 과잉임이 분명했다. 그 한심함에 자조 섞인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마음이 좀 이상했다. 무엇도 나눈 것 없는 옛 동창의 소식일 뿐인데, 마음이 조금 아렸다. 그건 아마 당시 역시나 같은 학원을 다녔던 한 친구와 스물이 되고 나눈 뒤늦은 대화에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친구도 내게 호감이 있었다는 얘기, 그래서 내가 핸드폰이 없다는 걸 주위 친구들에게 아쉬워했다는 이야기,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게 다 티가 났는데 왜 안 사귀는지 의아했다는 이야기. 이를 포함하여 그런 것들이 이제 와 무슨 소용이겠어 싶었던 말들이 무참히 이어졌던 그날의 대화.


2008년은 정말 기이한 한 해였다. 오죽 기이했으면, 다른 데는 관심일랑 전혀 없는 내가 그 해의 온도와 초록만은 똑똑히 기억할 정도다. 의외로 아쉬움은 없다. 흔해빠진 학창 시절 짝사랑 이야기의 전말을 알고도 동요되지는 않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고 철이 들었다. 그때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해 볼 걸, 이런 마음도 들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도, 열등감의 나는 그 친구에게 멋지고 떳떳하게 함께하자는 이야기를 건넬 자신이 도무지 없다. 세상엔 그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마주하는 진실들이 아무리 쓰더라도 억지로 삼켜내고 소화해야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서글프게도 어른이고 성장의 결과물이다. 그러다 다시금 더웠던 오늘 무성한 초록을 보는데 그 친구가 불현듯 떠올랐다. 밤새 쪽지를 주고받다가, 뜬금없이 '사이다'를 마시고 싶다는 그 친구에게 다음 날 아침 한 캔의 사이다를 건넨 적 있었다. 놀라워하며 사이다를 받던 그 환한 웃음을 한땐 열렬히 복기했다. 물론 나만 기억하는 기억일 것이다. 이제 난 잊히어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다만, 그저 바보처럼 어리숙하며 서툴렀고 모자랐던 날들의 나를 이젠 밉지 않게 추억할 수 있게 되었고, 별 좋은 기억일랑 건질 것 없는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빛나게 해 줘서 고마운 마음이다. 물론 그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를 못했듯, 고맙다는 얘기도 결코 그 친구에게 닿지는 않겠지.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하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니까. 그런 침묵의 무덤에 이 말도 하나 보탤 뿐이다.


"정말 고마워."

매거진의 이전글 SG워너비, '라라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