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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May 28. 2022

뒹굴뒹굴

2004년 9월 15일


랄라를 갖기 전까지 스톰과 나는 '뒹굴뒹굴 데이'를 즐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같이 느껴지지만 우리도 그렇게 한가한 주말의 한때를 즐기던 때가 있었다.


그럼 '뒹굴뒹굴 데이'가 무엇이냐? 말 그대로 뒹굴뒹굴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날이다.    


스톰은 업무와 일상의 스트레스를 산과 들, 바다와 강을 찾아다니며 드라이브와 여행으로 승화시키는 습관이 있다. 반면 결혼 전의 나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쇼핑을 즐기면서 학업과 일상에서 쌓인 피로감을 풀어내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이제는 주말 아침이면 으레 스타벅스 커피 한잔을 손에 쥐고 자연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는 스톰의 나들이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활기차고 활동적인 주말을 보내는 우리에게 한 달에 한번 꼴로 찾아오는 '뒹굴뒹굴 데이'의 묘미는 그야말로 짱이였다. 물론 이날은 아무런 가사노동이 없는 날이다. 빨래와 청소도 이미 이 날의 여유를 위해서 전날 다 해놓고, 부엌일은 음료수 가지러 냉장고 문을 여는 게 전부, 오로지 뒹굴뒹굴에만 전념하는 것에 이날의 의의가 있다.


일단 '뒹굴뒹굴 데이' 아침 일찍 스톰과 나는 의기투합하여 집 근처 한국 마켓에 간다. 새로 만든 김밥, 모둠전, 떡, 등을 사 오는 길에 빵집도 들러 서로 좋아하는 빵을 몇 종류 고른다. 다음은 한국 비디오 가게에서 한국 영화나 다큐멘터리 2편 정도, 또 블락버스터에서 외화 2편 정도를 빌려온다. 마지막으로 슈퍼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풍선껌, 사탕, 거미 베어, 초콜릿, 각종 쿠키를 구입하는 걸로 이날 장보기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각양각색의 비닐봉지가 스톰의 손에 들려지고, 우리는 너무나 뿌듯한 마음으로 봉지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꺼내 주방 아일랜드 위에 일렬로 정렬해 놓는다. 이때 우리 둘의 얼굴에는 '바로 이거야!' 하는 만족감의 미소가 돈다. 이때 느끼는 동질감이랄까 동지애 같은 감정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정겹다. 스톰이 방에 있는 메트레스를 거실로 옮겨 놓고 베개로 등받이를 만든 후 블라인드를 치면 모든 세팅은 끝!


오전 11시쯤 시작되는 영화 상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뒹굴뒹굴 데이'의 막이 오르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맘껏 군것질을 하고, 마시고, 웃고, 울고 하다가 1시쯤 영화가 끝나면 블라인드 뒤에 숨어있는 나른한 오후 햇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우리는 그렇게 편안한 낮잠을 즐겼다. 남은 세 개의 비디오는 물론 낮잠을 마친 오후부터 다시 상영되었고, 밤 10시쯤 스톰과 나는 '뒹굴뒹굴 데이'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다음 달에 찾아올 그날을 위해 두 눈이 빛났다.


랄라가 다음 달이면 두 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톰과 나의 '뒹굴뒹굴 데이'도 최소한 2년 동안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난번 차에서 스톰이 나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다시 그날이 올까?" 랄라를 사랑하지만 가을 햇살 뒤에 숨어 스톰과 단 둘이 편안한 '뒹굴뒹굴 데이'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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