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느 겨울밤에 생긴 일

육아일기

by Rainsonata

2004년 11월 24일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던 어느 날 랄라와 산책을 하다 베란다 벤치 위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호박을 발견했다. 이 호박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연민의 정이 느껴져 재빨리 사진기에 담아왔는데, 이 호박의 마음을 진정 알아줄 사람은 다름 아닌 스톰이다.


올겨울 영하 30도를 넘나들던 유난히 추웠던 날 밤, 스톰이랑 베란다에서 잠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든 랄라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해서 잠에서 깬 줄 알고 나는 먼저 베란다 문을 닫고 바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들어가 살펴보니 랄라가 잠결에 뒤척이고 있길래 그 옆에 누워서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있었는데, 시간이 한참 흘러도 스톰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스톰의 주특기 중에는 깜짝 콘서트도 있지만, 숨바꼭질 또한 대단한 고수인지라 또 어딘가 숨어서 내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나 보다 하고 거실로 살금살금 걸어 나와보니, 식탁 밑에도 없고 옷장 안에도 없고 욕실 샤워 커튼을 들쳐봐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부엌 쪽을 자세히 찾아보려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베란다에서 뭔가 검은 물체가 휙- 하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난 정말 도둑인 줄 알았다. 아니면 무슨 허깨비를 본 것이든지. 근데 그 검은 그림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스톰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태 파악을 잘 못했던 나는 스톰이 거실에서 혼자 쉬고 있다가 내가 방에서 나오는 인기척을 듣고 재빨리 베란다로 뛰어 나갔다고 생각했다. 이 무시무시하게 추운 겨울밤에 설마 달랑 팬티 한 장 입고 아까부터 계속 밖에 서 있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베란다 문 앞에서 "빨리 들어와! 이제 거기 숨어있는 거 들켰으니까 그만 들어와!" 하면서 스톰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려고 보니, 아니 웬걸! 베란다 문이 거실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되어있었다. 문을 열자 스톰은 내쪽을 보며 다리를 스쿠루 바처럼 비비 꼬고서는 아주 불쌍하면서도 넋이 나간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동태가 돼버린 스톰은 얼은 몸을 녹이려 전기담요 속에 몸을 숨기고서야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들어가고 바로 자기도 들어오려고 했는데 베란다 문이 안 열리더란다. 여러 번 문을 힘껏 밀면서 시도해 봤는데 아주 꽁꽁 닫혀버려서 그제야 안에서 잠금장치가 되어 버린 것을 알았다고 한다. 문을 여는 것을 포기한 스톰은 밖에서 내 이름을 수차례 불러 봤는데, 너무 밤이 깊었던지라 이웃들이 깰까 봐 너무 큰 소리로 외칠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 후,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나오지 않자 아마 아기를 재우다가 나도 같이 잠들었다는 결론에 다다른 스톰은 베란다 바닥에 놓인 카펫으로 몸을 두른 뒤 1층으로 뛰어내린 다음 중앙현관을 통해 다시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고, 비장한 각오로 베란다를 서성이며 뛰어 내릴 곳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내가 등장했다고 한다.


아무리 우리 집이 2층이라고는 하지만 그 추운 날 팬티 한 장 걸치고 1층으로 뛰어내려 종종걸음으로 다시 현관문을 두드려야 했을 스톰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하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나의 실수로 문이 닫히는 바람에 결국은 동태 신세가 되어버린 스톰에게 아주 많이 미안한 밤이었다. 토론토의 겨울은 정말 매섭고 어마 무시하게 춥다. 그것도 한 밤중에 이런 일을 겪은 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마치 어디서 듣고 온 코미디 한편을 이야기해주듯 나에게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톰의 의연함에 다시 한번 놀란 밤이기도 했다.


스톰, 정말 미안해!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빠는 에프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