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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육아일기

by Rainsonata

2012년 2월 1일


2월의 첫날. 아홉 살의 랄라가 <어린 왕자>의 첫 장을 열었다.


지금 랄라 손에 들려있는 영문본을 구입한 건 정확히 9년 전, 캐나다 Chapters Bayview Village 에서였다. 그때가 겨울이었으니까 랄라가 막 첫 돌을 넘긴 나이였을 것이다.


지금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 돋을 만큼 혹독한 토론토의 겨울을 나는 그 해 처음 만났다. 당시 스톰은 실리콘벨리에서 토론토의 IT 회사로 전근하면서 새 직장환경에 적응하랴, 살인적인 해외출장을 소화해 내랴 정신이 없었다. 그런 스톰은 매달 2주씩 집을 비웠고, 평소 몸이 약했던 나는 토론토에서 보낸 첫겨울 내내 심한 감기 몸살을 격주로 앓았다. 잦은 기침으로 갈비뼈가 아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날들도 많았고, 그건 바로 수면부족으로 이어졌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무엇보다 집을 비운 스톰을 대신해 랄라에게 엄마/아빠 몫을 해야만 했다. 그때는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고, 체력은 따라주지도 못하는데 아이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체력의 한계를 정신력이 분명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돌아온 답은 자궁근종이었다. 그리고 결국 수술을 받았다.


그런 겨울날, 잠시 몸이 좋아져 동네 서점에 나가 구입한 책이 바로 <어린 왕자>이다. 지금까지 나의 손을 거쳐간 여러 권의 <어린 왕자> 중에서도 이 책이 나에게 책 이상의 의미와 감동을 주는 건, 당시 초보 엄마였던 나의 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책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던 나의 간절함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유치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책에 꾸역꾸역 밑줄까지 그어가며 정독한 이유는, 앞으로 랄라가 크면 한글판 <어린 왕자> 보다 영문판을 먼저 접하게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엄마의 흔적이 남겨진 책을 딸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랄라가 작은 손으로 파란 표지의 <어린 왕자>의 첫 장을 여는 순간. 나는 울컥하며 침을 삼켰다. 단순히 침을 삼킨 것인지, 그때의 설움을 삼킨 것인지, 지금의 감동을 삼킨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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